[노트북을 열며] 성철스님의 참 뜻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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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한국 불교의 마지막 보루요, 희망인 해인사가 '최고' '최대' 를 좇는 속(俗)스러운 도량으로 변질돼가는 것을 좌시한다면 그들은 이미 불교인이 아니다. 대중의 불신과 원망을 불러일으키는 불사(佛事)는 이미 불사가 아니다…. "

마치 무슨 격문(檄文)같다. 수경(收耕)이라는 중진 스님이 이번주 발간된 불교계 신문에 기고한 글의 일부다. 글의 제목은 '자운.성철의 죽음을 곡(哭)한다' .

수경 스님은 30여년간 전국의 선방에서 참선.수행해온 전형적인 선승(禪僧)이다. 지리산 실상사에서 수행하던 중 지리산에 댐을 만든다는 소리를 듣고 지난해 산중에서 걸어 나왔다. 이후 지금까지 지리산댐 반대운동 등 환경운동을 벌여왔다. 그런 스님이 갑자기 불교계 최고 명문가인 해인사를 정면비판하면서 대선사(大禪師)의 이름까지 들먹이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스님이 나서 격문 같은 글을 기고한 원인이 되고 있는 '불사' (불교와 관련된 일이나 공사)는 '세계 최대 좌불상 건립' 이다. 해인사에서 지난달말 건립계획을 밝혔다. 높이 43m, 좌우 40m, 앞뒤 30m의 청동 좌불(坐佛)로 예산은 약 70억원. 2003년 완공예정이다. 위치는 해인사 들어가는 입구로 본찰(큰절)에서 1㎞ 남짓 떨어진 곳이다.

일반적으로 불교에서 불상을 만드는 일은 공덕을 쌓는 가장 훌륭한 방법으로 칭찬받는다. 그렇지만 '세계 최대 규모' 의 좌불상이 해인사에 세워진다는 것은 어쩐지 거북한 느낌을 준다.

우선 해인사의 이미지와 맞지 않다. 해인사는 가야산 자락에 싸인 아늑하면서도 장엄한 느낌을 주는 천년의 고찰이다. 그리고 해인사의 상징은 팔만대장경이다. 해인사는 거대한 불상으로 상징되는 관광용 사찰이 아니라 부처님의 말씀을 모신 법보(法寶)사찰이요, 천년 전통의 수행도량인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대불(大佛)을 만들기보다 팔만대장경이라는 세계적 유산을 되살리는 데 힘을 쓰는 것이 해인사에 더 어울리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한자로 된 팔만대장경을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스님이 거의 사라져가고 있는 요즘이다. 따라서 대장경의 가르침을 널리 알리려면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이 시급하다.

동국대 역경원에서 한글 번역사업을 했는데, 예산부족으로 37년이나 걸리는 바람에 60년대에 번역한 내용을 다시 번역해야 하는 상황이다. 동시에 이를 전산화하고, 나아가 영어로 번역하는 일 등이 모두 불교현대화의 산적한 과제들이다. 이러한 작업을 위한 인재양성, 스님 교육도 병행해야 할 소프트웨어 개발이다. 불행히도 모두 돈문제로 진척이 없는 일이기도 하다.

한편 수경 스님이 글의 제목을 '자운.성철의 죽음을 곡한다' 로 붙인 것도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세간의 비판이 일자 해인사측에서 대불조성을 "큰스님의 유지(遺志)" 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경 스님은 이에 대해 "성철 스님이 그런 유지를 남겼을 리가 없다" 는 입장이다.

열반한 스님을 불러 물어볼 수는 없지만 큰스님의 평소 말씀으로 미뤄 수경 스님의 주장이 크게 틀리지는 않는 듯하다. 성철 스님은 "불사 중 최고 불사는 참선이고, 불공 중 참불공은 불쌍한 사람 돕는 일" 이라고 가르치지 않았던가.

오병상 문화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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