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언론이 유죄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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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여권에 몸담고 있는 인사들의 언론관(言論觀)이 위험수위를 넘어섰다. 여권 수뇌부가 언론에 대해 불만을 표출해온 것은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니지만, 초선 의원이나 386세대 의원들도 덩달아 동조하고, 심지어 한 술 더 뜨고 있으니 나라와 언론의 장래가 염려된다.

안동수(安東洙)파동, 당내 정풍(整風)파문과 관련해 지난달 31일 열렸던 의원 워크숍의 대화록은 민주당의 한심한 대(對)언론 인식 수준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언론이 정치를 깔본다" 는 말은 그나마 애교스럽다. "최근 언론의 보도 태도는 (현 상황을 대통령의)레임덕으로 몰아가려는 것" 이라거나 "중앙.조선.동아일보가 (정풍파의 성명발표 등을)권력투쟁도 아닌데 심각한 문제로 보도하고 있다" 고 하는 데서는 이미 언론에 대한 노골적인 적대감이 묻어난다. 당 지지율 하락이 언론을 '장악'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발언에서는 섬뜩함마저 느껴진다.

국회의원은 지역 민심의 대변자다. 그들이 현지에서 보고 들은 내용을 발언해 놓고 이를 보도한 언론을 여론조작이라고 몰아붙인다면 책임있는 여당 의원으로서 취할 태도가 아니다.

민주당 김중권(金重權)대표의 그제 발언도 비슷한 인식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는 당내 386의원들과 만나 "지금은 민심이 아니라 여론이 나쁜 것" 이라고 했다고 한다.

당 대표로서 실의에 빠진 의원들을 격려하는 차원의 발언일 수 있겠지만 金대표가 이런 주장을 되풀이하는 것을 보면 '언론이 여론을 조작하는 바람에 여권이 어려운 상태에 빠졌다' 고 생각하는 게 아닌지 걱정스럽다. 언론이 여론을 조작한다면 독자들은 당장 그런 언론을 거부할 수 있게 돼 있다.

아직도 집권당이 여론의 바른 방향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언론에 그 책임을 미룬다면, 위기를 기회로 반전시킬 남은 기회마저 스스로 버리는 행위가 될 것이다.

여권은 반민주적.반역사적 해법에 솔깃해하지 말고 지금이라도 언론과 여론이, 또 민심이 자발적으로 지지해줄 수 있는 국정쇄신책을 내놓는 데 중지(衆智)를 모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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