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정희성 네번째 시집 '시를 찾아서' 출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지난 세기는 이 땅의 모두에게 괴로웠다. 광복과 함께 희망의 고고성을 울렸던 해방둥이들도 어려서 전쟁을 겪어야했고 젊음을 독재 치하에서 보내야 했다.

좋은 시절 만났으면 빼어나게 아름다운 서정시를 남겼을 김남주는 '시는 곧 무기' 라며, 아니 자신의 몸 자체가 무기인 전사(戰士)로서 독재에 순진하게 맞서다 이 세상을 떴다. 또 김명수 시인은 이런 현실이 숨쉬기 답답하다며 어디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고 같은 해방둥이 시인 정희성씨는 위의 시 '동년일행(同年一行)' 에서 말하고 있다.

1970년 문단에 나와 『저문 강에 삽을 씻고』 등 현실지향적 시집을 펴내며 그의 시가 시위 현장에 대자보로 나붙기도 했던 정희성(사진)씨가 네번째 시집 『시를 찾아서』(창작과비평사.5천원)를 펴냈다. 이번 시집에서 정씨는 현실을 '훌쩍' 떠나 시 자체를 찾아나서고 있다.

"이제 내 시에 쓰인/봄이니 겨울이니 하는 말로/시대 상황을 연상치 마라/내 이미 세월을 잊은 지 오래/세상은 망해가는데/나는 사랑을 시작했네/저 산에도 봄이 오려는지/아아, 수런대는 소리" ( '봄소식' 전문)

같이 실린 다른 시에서 '민중의 좋은 벗이 되리라 다짐했던 나' 라고 밝힌 시인이 왜 이제 자신의 시에서 민중과 현실과 '시대 상황을 연상치 말라' 고 했을까?

"세상이 달라졌다/저항은 영원히 우리들의 몫인 줄 알았는데/이제는 가진 자들이 저항을 하고 있다/세상이 많이 달라져서/저항은 어떤 이들에겐 밥이 되었고/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권력이 되었지만/우리 같은 얼간이들은 저항마저 빼앗겼다/세상은 확실히 달라졌다/이제는 벗들도 말수가 적어졌고/개들이 뼈다귀를 물고 나무 그늘로 사라진/뜨거운 여름 낮의 한때처럼/세상은 한결 고요해졌다"

'세상이 달라졌다' 전문에서와 같이 저항의 주체가 바뀌고, 저항의 순수성.도덕성도 썩었다. 어제의 저항의 순수한 벗들, 김남주는 죽고 김명수는 초야로 돌아갔는데도 밥과 권력이라는 개뼈다귀를 얻기 위해 저항한 듯한 또다른 불순한 벗들에 대한 참담한 실망 때문인가.

이제 자신의 시에서 저항성.사회성을 빼버리겠다는 각오다. 그러면서 김씨는 이번 시집에서 그 저항 때문에 증오했던 언어를 거둬들이고 사랑, 시의 속살, 본래의 언어로 돌아가 아래와 같은 빼어난 시들을 얻고 있다.

"그대, 알알이 고운 시 이삭 물고 와/잠결에 떨구고 가는 새벽/푸드덕/새 소리에 놀란 나뭇잎/이슬을 털고/빛무리에 싸여 눈뜬/내 이마 서늘하다" ( '시가 오는 새벽' 전문) 이 시의 '그대' 나 '새벽' 등을 역사적 희망 등으로만 좁혀서 읽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물론 연인, 사랑, 깨달음 그 모든 것을 포괄하는 언어로 읽어야 옳다.

이 때 시는 구차스런 삶과 현실을 껴안으면서도 훌쩍 뛰어넘어 혼을 울리는 큰 시가 된다. 영겁의 우주만물과 교감했던 신라 때의 향가, 그 넓고 심오한 시세계를 향해 정씨는 말을 아끼며 나아가고 있다.

이경철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