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노트북을 열며

'차기'로 떠오른 강경 총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김진국
김진국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노무현 대통령과 이해찬 총리는 호흡이 잘 맞는다. 초선의원 시절부터다. 김영삼.김대중 두 진영에 갈라서 있었지만 같은 당 의원보다 더 가까웠다.

감정을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언행까지 닮았다. 노 대통령은 1988년 청문회에서 전두환 대통령을 향해 명패를 내동댕이쳤다. 재야시절 이 총리는 마음에 들지 않는 기사를 쓴 기자의 따귀를 올려붙인 적이 있다. 8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재야에서 독자 후보를 내는 문제가 거론된다는 기사 때문이다. 결국 백기완 후보가 출마해 기사가 사실로 판명됐지만 당시 이 총리는 사과하지 않았다. 98년 교육부 장관 시절엔 호남 편중인사를 추궁한 여성 의원에게 오히려 사과를 요구했다.

그런 전력을 고려하면 언론과 야당을 향한 이 총리의 독설은 계획적 도발로 보이지 않는다. 자기 감정에 솔직했을 뿐이다. 이 총리가 의도했건 안했건 그 발언의 파장은 크다. 예산국회가 완전히 멈춰버렸다. 여권 내 차기 경쟁구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노사모는 열광했다. 이 총리를 차기 대통령 후보로 내세우자는 주장까지 나왔다. 그러니 차기 경쟁 구도에서 이 총리가 이번 발언의 덕을 톡톡히 본 셈이다. 적어도 당내 경쟁에서는 말이다.

'천.신.정'으로 불리는 당권파는 유탄을 맞았다. 천정배 원내대표는 연말까지 4대 법안을 처리하겠다고 말해왔다. 그런데 이 총리가 한나라당에 오물을 끼얹어버렸으니 천 원내대표로서는 초조하게 됐다. '탈레반'으로까지 불리는 천 대표가 "과거 총리가 국회를 파행시킨 적이 있느냐"고 불평한 것도 이해가 간다. 신기남 전 의장의 낙마에 이어 천 대표마저 국회 운영의 책임을 지고 무너지면 당권파로선 큰 타격이다.

어느 나라에서나 후계구도를 예측하기는 수월하지 않다. 옛 소련의 서기장에 대해서는 대머리와 대머리가 아닌 사람이 반복된다는 가설이 있었다. 레닌은 대머리였지만 스탈린은 아니다. 그 후계자인 흐루시초프는 대머리다. 브레즈네프-안드로포프-체르넨코-고르바초프까지 그 규칙이 반복됐다. 장난스러운 그 규칙이 소련이 분열된 뒤 옐친과 푸틴까지 이어지는 걸 보면 신통하다.

한국의 대통령에게는 강-온의 반복이 거론됐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강성이라면 윤보선 전 대통령은 온건이라는 것이다. 그 논리도 박정희-최규하-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그럴듯해 보인다.

머리 모양이 후계구도를 결정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가설이지만 강온의 반복은 다르다. 전임 대통령에 대한 불만이 그와 다른 이미지의 대통령을 기대하게 만들어 시계추처럼 반복될 가능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6.29선언과 보통사람을 내세우고, 김영삼 전 대통령이 문민정부, 김대중 전 대통령이 경제대통령을 내세운 것도 전임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불만을 긁어주는 이미지 전략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기득권층을 원색적으로 공격하는 전투적 이미지로 승부를 걸었다. 이 총리는 그와 똑같은 전투적 이미지 덕분에 후계구도에서 부각되고 있다. 가설이란 건 깨지기 위해 있는 것이란 말도 있지만 이 총리가 성공하면 강온 순환의 가설도 허튼소리가 될 수밖에 없다.

여권에서 누구를 후보로 내세우건 밖에서 콩이야 팥이야 할 일이 아니다. 하지만 대통령과 총리라는 자리는 정치인이기 이전에 국정의 중심이다. 총리의 말이 옳고 그르고가 문제가 아니다. 대통령과 총리가 앞다퉈 예측불허의 돌출 언행으로 갈등을 유발한다면 국정 안정, 국민 통합은 누구의 몫이어야 하나.

김진국 정치부 부장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