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커비전] 히딩크 감독 사생활 배려해줘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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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1999년 시즌 초반 미국여자프로골프협회(LPGA) 투어에서 박세리의 부진은 국민의 원성을 자아냈다. 그 원인으로 박세리의 남자 친구가 지목됐다.

"세리가 연애하느라고 훈련도 안한대. 돈이 생기니까 헝그리 정신도 없어지고…. "

그러나 시즌 중반 2승을 올리며 기세를 높이자 남자 친구 로런스 첸은 어느새 '세리에게 힘을 주는 첸' 으로 변신했다.

지난 9일 아디다스컵 결승 1차전이 열린 수원공설운동장에 거스 히딩크 감독이 여자 친구를 데리고 본부석에 자리잡았다. 이 때부터 히딩크와 여자 친구는 카메라의 집중 표적이 됐다. 연속으로 터지는 플래시 세례에 경기를 관전하는데 방해받자 히딩크는 거친 표현과 손동작으로 불만을 표시했다.

지난 7일 유소년 리그 결승전이 열렸던 미사리 경기장에서는 이성을 잃을 정도로 흥분했다. "사생활에 대해 한번만 더 물어보면 가만두지 않겠다" 며 한 기자에게 저속한 표현까지 쓰며 심하게 화를 냈다. 이유는 기자가 흑인 여자친구의 인적 사항을 주변 사람들에게 취재했기 때문이다.

월드컵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고조되면서 히딩크 감독은 뉴스 메이커다. 그의 선수 평가, 전술 구사, 경기에 대한 평가, 대표선수 선발 등은 텔레비전과 신문 지면을 통해 시청자와 독자에게 전달된다.

현재 부인과 별거 중인 그가 여자 친구를 공식 석상에 동반하는 것은 한국인에게는 분명 눈길을 받을 일이다. 그러나 서양인에게는 자연스런 일이다.

이번 일이 국내 축구 팬들에게 스타 감독의 사생활과 축구를 되새김질할 수 있는 기회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축구 감독들에게 축구는 인생에 비유되곤 한다. 깊게 빠지면 빠질수록 심오해져 어렵고, 욕심부리면 부릴수록 결과는 망가지고, 침울하고 사기가 떨어지면 엉망이 되고, 흥분하거나 예민해지면 중대한 실수를 하게 된다. 그래서 겸손과 이성, 지성적인 판단력이 요구되는 것이다.

과거 박세리에게 성적 부진보다 더 괴롭게 했던 것은 첸과의 교제에 대한 수군거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박세리의 지갑에 간직된 첸의 사진은 엄청난 스트레스를 해소시키는 '묘약' 이었을 것이다.

박세리는 99년 첸이 경기장에 직접 와서 응원해 준 숍라이트 클래식과 제이미 파 크로거 클래식에서 연속 우승했다. 남자친구가 준 심리적 안정 때문일 것이다. 특히 제이미 파 크로거 클래식 대회에서 극적인 역전 우승 퍼팅을 성공시킨 뒤 박세리는 첸과 진한 포옹을 나눴다. 그리고 첸은 박세리 가족과 식사도 함께 하며 공개적으로 박세리와 사귀었다.

박세리가 골프만 하는 기계가 아니고, 당시 이성 문제에 고민할 22세 여성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우리는 잊고 있었다.

이제 히딩크 감독에게도 축구장을 떠나 쉬는 시간에는 자기만의 생각과 사생활을 즐길 수 있도록 배려해 주자. 그것이 곧 한국 축구를 위하는 길이다.

신문선<본지 축구해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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