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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금융산업의 분서갱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최근 은행연합회는 은행공동전산망에 등록된 신용불량자 중 연체금액을 전액 상환한 1백8만명의 기록을 일괄삭제했다. 또 금융감독원은 협회 기록에서는 삭제했지만 개별 금융사에서 그 전 기록을 계속 보유하는 것을 막기 위해 검사를 하겠다고 발표했다.

***신용사면으로 해결 될까

이러한 움직임은 민주당과 정부가 지난 4월 3일 '서민금융이용자보호대책' 을 마련하기로 결정한 후 신용불량자 최소화 방안을 강구하게 되면서 나온 대책으로 일반국민이나 언론에서는 일반적으로 환영하는 분위기인 것 같다.

사실 신용불량자란 은행공동전산망에 불량으로 등록된 사람, 즉 신용불량기록 보유자들이므로 기록 삭제는 가장 손쉽게 신용불량자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이긴 하다.

그러나 이는 편법일 뿐 아니라, 무엇보다 금융업의 경제적 기초원리에 대한 무지나 정치적 단견에서 나온 졸속조치로 결국에 가서는 신용불량자를 감소시키기는커녕 도리어 신용불량자를 더욱 양산할 위험을 갖고 있다. 게다가 이런 식의 '대책 아닌 대책' 이 추진돼온 절차 그 자체에서도 그동안 우리나라의 금융산업에서 가장 큰 폐단으로 지적돼온 관치금융의 끈질긴 꼬리를 보는 듯해 우려를 금할 수 없다.

먼저 신용정보기록제도가 왜 애초에 생겼을까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대출업 운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신용위험관리라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금융업 종사자 사이에서도 철저한 이해가 부족한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신용위험관리의 핵심이 차입자에 대한 예상부도율 추정에 있다는 사실이다.

풀어 말하면 신용위험관리의 요체는 부도가 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나 기업에 아예 처음부터 돈을 안빌려주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빌려준 사람들 중에서 몇 명이 원리금을 예정대로 상환할까에 대한 확률을 파악하는 데 있다는 말이다.

신용정보기록제도는 바로 이 예상부도율 추정에 필수적인 수단이다. 은행에서 승인 또는 거절에 대한 양자택일만의 결정을 하지 않고 신용등급을 매겨 비록 신용등급이 최상은 아니지만 일정등급 이상이면 금리를 더 받고 대출하는 것도 결국은 이 신용정보에 의거한 예상부도율 추정이 대출업의 핵심업무이기 때문이다.

개인대출의 경우 기업대출에 비해 가격조정보다 승인 또는 거절 결정만 내리게 되는 현상 역시 개인대출에서는 건별 대출액 규모가 작고 개인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비용이 기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커 예상부도율을 추정하기가 어렵다는 사실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신용사면은 바로 이 신용위험관리의 폐부에 칼을 박는 행위다. 예상부도율 추정의 신뢰도를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예상부도율 추정에 필요한 요소를 선진국 경험상 중요도 순서대로 열거하면 대출신청자의 평판(reputation), 수입이나 재산 대비 부채의 크기, 수입의 안정성, 담보 등을 들 수 있다.

이 중 가장 먼저 든 대출신청자의 평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과거 대출거래 관련 이력이고, 또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연체 관련 이력이다.

***위험관리 못해 부작용도

특히 한국과 같이 제대로 갚은 기록(positive information)을 축적하지 않는 나라일수록 더욱 그렇다. 그런데 신용사면을 통해 이 연체이력을 지우면 똑똑한 금융업자의 경우에는 가뜩이나 정보수집이 어려운 개인대출을 상대적으로 축소시키거나 금리를 일괄적으로 더 받을 수밖에 없게 된다.

이 경우 개인들은 결국 사(私)금융권에 더 의존하게 되고, 사금융권의 살인적 금리는 개인파산을 더 증대시킬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 묻지마 대출을 계속하는 금융업체는 처음부터 대출받지 말았어야 하는 사람들이 대출을 받을 확률을 높일 것이니 이 또한 결국 신용불량자를 증가시키게 될 것이다.

그런데 정부는 기록을 지웠으므로 대출을 더 해줄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으니 어이가 없을 뿐이다.

게다가 지난해 신용사면 때만 해도 개별 업체에서 자체 기준에 의해 고객관리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던 금융감독원이 이번에는 감사를 해 처벌하겠다니 정치인과 관료는 자기들이 정하면 세상을 거꾸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周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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