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자신감 잃은 여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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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야당 총재 시절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토론을 좋아했다. 어떤 결정도 단번에 하지 않았다. 측근은 물론 다양한 인사들을 만나면서 조언을 구했고, 자신의 생각을 조금씩 흘리면서 반응을 살폈다. 또 이를 통해 지지세력을 넓힌 뒤에야 결론을 내렸다.

이것은 당시 야당의 양축을 이룬 양金(김영삼 전 대통령과 金대통령)을 대비하는 중요한 포인트였다. 金전대통령은 한쪽 방향으로 가다가도 '이게 아니다' 싶으면 단번에 U턴했다. 반면 金대통령은 조금씩 조금씩 입장을 바꾸면서 철저히 논리로 뒷받침했다.

"주변 사람도 설득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국민을 설득할 수 있느냐" 는 그의 신념 때문이다. 취임 후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金대통령은 지난 연말부터 '강한 대통령' 을 내세우며 '법과 원칙' 을 지키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면서도 실상은 대화와 타협을 우선했다. 지루한 의료계 파업이나 구조조정을 가로막는 노동자 시위에 대해서도 金대통령은 "끝까지 대화를 하라" 고 주문했다.

지난달 30일 이한동(李漢東)총리 해임건의안을 부결시킨 여당의 방법은 그런 점에서 DJ방식은 아니다. 스스로 공천한 민주당 의원들조차 부(否)표를 던지도록 설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당의원까지 믿지 못한 것은 李총리의 자질이 부족해 반대표가 나올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DJP연합이나 3당 정책연합의 당위성을 여당의원들에게 확신시키지 못한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여당 의원들의 양식과 판단력을 믿지 못하는 것일까.

여기에는 여당의 위기감이 깔려 있다.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총리 해임건의안이 통과됐을 때를 상상해보라" 고 말했다. 자민련은 '몽니' 를 부릴 것이고, 소수여당으로서 곧바로 레임덕 현상이 올 게 뻔하지 않으냐고 했다.

어느 쪽이건 과거 야당 시절 그렇게도 비난했던 백지투표.공개투표를 창조적으로 모방한 셈이다. 김종필(金鍾泌)총리 임명동의안 표결 때는 한나라당이 기표하지 않고 백지투표를 하자 민주당은 이를 공개투표라고 비난했다.

여야 모두 누워 침뱉고 있는 셈이다. 이런 명분없는 정쟁(政爭)이 얼마나 계속돼야 할까. 남은 임기 중 지금보다 정국상황이 더 나아지기는 어렵다. 대통령 선거가 가까워질수록 여야간 대립은 날카로울 수밖에 없다.

심각한 것은 여권이 국정을 끌고 나갈 자신감을 잃었다는 점이다. 자신감의 상실은 불신과 편법의 유혹을 받기 쉽다.

청와대 한 비서관은 "요즘은 되는 게 없다" 고 한숨을 쉬었다. 청와대에서 느껴지는 무력감은 3당 정책공조 실험의 한계 때문만은 아니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졸업을 축하하기도 전에 주식과 수출, 환율과 물가에 모두 다시 비상등을 켜야 하는 상황이 됐다.

교육이민으로 상징되는 교육정책의 실패, 남북교류의 교착에 실업자의 증가, 노동계의 불만이 꼬리를 물고 있다. 이것은 여당의 지방선거 패배로 나타났다. 그 돌파구로 여권 일각에서 '정계 개편론' 까지 고개를 들고 있다.

DJP공조도, 여야 상생(相生)정치도, DJP+α의 3당 정책공조도 한계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더욱 심각한 정치파행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대화와 타협을 위한 金대통령의 인내력이 정치권에서는 정말 먹혀들지 않는 것일까.

김진국 <정치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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