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나] 단 프랑크 소설 '보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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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나는 언제나 책을 천천히 읽는다. 심지어 만화책마저도 삽화의 장면 하나하나를 훑어내는 나의 독서습관은 어린시절 시집을 탐독했던 데서 기인한 것 같다.

10대 시절 옆집의 친구 누나에 대한 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을 때 옥상에 홀로 앉아 김초혜의 시집 『사랑굿』(한국문학사)을 읽으면서 글자 하나 하나가 어쩌면 내 이야기와 똑 같은지, 아버지 주머니에서 몰래 꺼낸 담배 한대 피워 물고 연기 때문인지, 풋사랑의 서글픔 때문인지 서서 눈물을 떨구던 기억이 난다.

그후 나의 성장기는 칼릴 지브란의 잠언집들,『보여줄 수 있는 사랑은 아주 작습니다』(진선출판사), 『모래 물거품』(진선출판사) 『예언자』(문예출판사)와 함께 했고 인생의 허무가 짙게 배어 있던 20대 초반엔 천상병의 『귀천』이나 박재삼의 『울음이 타는 가을 강』(혜원출판사)이 내 친구가 돼 주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외롭지 않다. 탐닉하는 나의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요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은 시집이 아니라 단 프랑크의 소설 『보엠』(이끌리오)이다. 20세기 초 프랑스 파리의 몽마르트와 몽파르나스에 살았던 현대예술의 거장들에 대한 이야기로, 피카소.모딜리아니.막스 자코브 같은 이방인들이 모여 만들어 내던 '자유에 대한 갈망의 외침' 이 새로운 세상을 여는 회화나 조각으로, 또는 시와 선율로 탄생했음을 보여준다.

탐닉은 자유를 위한 또 다른 방법인지 모른다. 그 대상이 신(神)이든, 예술이든, 성(性)이든 그 추구의 끝은 언제나 하나의 주제로 결론지어진다. 세상 사람들은 나를 보석 디자이너라고 부른다.

자연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돌을 다듬어 인체에 입혀지는 예술품을 만드는 사람인 나에게 붙여진 이름이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 그 이름에서 무엇인가 부족함을 느낀다. 나의 진정한 대상은 보석 그 자체보다 그것이 입혀지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탐닉의 대상은 오직 사람이다.

그 대상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새로운 것에 대한 창조는 없다. 그것이 나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용혜원 시인의 『함께 있으면 좋은 사람』(양피지)처럼 따뜻함이 느껴지는 아름다운 말들과 더불어, 언제나 읊조리는 박재삼 시인의 시 한 구절이 생각난다. "새는 죽을 때 소리가 곱고, 사람은 죽을 때 말이 선하다던데 내 노래는 곱지도 선하지도 않으니 아직은 죽을 날이 멀었는가 보다. " 언젠가 나의 노래를 들을 수 있을 때까지 나의 탐닉은 계속 될 것이다.

홍성민 (보석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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