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외환·외자·외곬인생 40년 (5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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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57. 돌고 도는 환율

한국.대만.일본 등에 환율 인하 압력을 넣은 멀포드 미 재무차관보는 유대계였다. 이 때문에 당시 일본에서는 멀포드가 유대 자본이 조종하는 국제통화 마피아의 대리인이라는 과장된 음모설이 돌았다. 그 후 베이커 미 재무장관이 내게 제안했던 하와이행은 이용성(李勇成) 당시 재무부 기획관리실장(전 은행감독원장) 몫이 됐다.

6공 출범 직후 그는 미국과의 국제금융회의에 참석했고, 이미 밝힌 대로 1990년 3월 우리나라는 시장평균환율제로 이행했다.

환율이 외환시장에서 시장원리에 따라 결정되도록 시장평균환율제를 도입하자는 것은 그의 아이디어였다. 그로서는 수출을 늘리기 위해 P(실세 반영을 위한 가중치)를 최대한 활용하다가 이를 '제거' 하는 역할까지 떠맡은 것이었다. 내가 시작한 환율 개혁을 마무리한 사람이 바로 그였다.

환율은 국내외 금융시장의 변동에 따라 움직이도록 해야 한다. 해외 요인의 영향을 받지 않으려고 손을 쓰면 나중에 그 폐해가 곱절로 나타나게 돼 있다. 올라가야 할 상황이라면 올라가도록 하는 편이 낫다.

그로부터 10여년 후 우리나라가 외환위기의 마루에 있었던 98년 1월 나는 로렌스 서머스 미 재무부 부장관을 만나러 워싱턴으로 날아갔다. 10여년의 세월을 사이에 두고 한.미간 금융정책 현안은 원화 평가절상에서 평가절하로 바뀌어 있었다. 최근 환율이 다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환율이든 금리든 그렇게 돌고 도는 것이다.

88년 내가 아시아개발은행(ADB) 부총재로 가 있을 때 인도네시아 기획 담당 장관이 "인도네시아가 모라토리엄(채무지불 유예)을 선언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고 내게 물었다. 그는 오일 쇼크 당시의 내 경험담을 듣고 싶어했다. 나는 "어떤 대가를 치르든 모라토리엄보다는 싸게 먹힌다" 고 말했다.

당시 인도네시아의 대외 채무는 대부분 공공 차관이었다. 끌어쓴 민간 단기자금은 2백억달러 정도였다. 모라토리엄으로 가면 민간부문의 채무도 동결된다. 채무가 동결되면 사실상 수입도 중단된다.

나는 수입을 하지 않고 어떻게 버티겠느냐고 반문했다. 나는 어떻게든 길이 열릴 것이라고 말했다. ADB.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 등 국제금융기구들이 수수방관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그 후 인도네시아는 석유수출국기구(OPEC)에 가입했고 외환위기로부터 벗어났다.

67년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제 1차 ADB 총회에 실무자로 처음 참석한 이래 재무장관을 거쳐 ADB에 나가 부총재를 하는 동안 나는 ADB 총회에 모두 15번 참석했다. 창립 당시 준비 실무 책임자였던 후지오카는 훗날 ADB 총재 자격으로 내게 ADB 부총재로 와 달라고 요청을 했다. 사람의 인연도 이렇게 돌고 도는 것이다.

재무부 차관 시절의 일이다.

경제기획원이 생기면서 기획원으로 넘어간 외자도입 업무가 다시 재무부로 이관됐다. 그 때까지만 해도 외환관리는 재무부 소관이었고 상업차관, 즉 외자 도입은 기획원이 주무 부처였다. 재무부 외환과에 근무할 때 외환관리와 함께 내가 맡고 있던 외자도입 업무가 기획원으로 넘어가며 당시 국제금융 시장에서 돈 꾸는 문제의 처리가 정부 안에서 이원화돼 있었다.

어차피 돈을 꿔주는 사람들은 국제금융 시장의 자본가들이었다. 은행 차관이든 상업차관이든 국제금융 시장을 상대로 대책을 세워야 하는데 창구가 서로 다르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통합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는 게 나의 입장이었다. 엉뚱하게 두 부처간의 권한 다툼으로 변질될 수도 있어 해결이 만만치는 않았다.

정인용 前경제부총리

정리=이필재 이코노미스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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