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문화산책] 18. 숫자 붙여진 명물·명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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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자연 풍광으로 유명한 관동8경을 일컬을 때 아름다운 곳이 꼭 8개만은 아니겠지만 우리의 옛사람들은 꼭 짚어서 숫자를 붙이는 관습이 있었다. 북녘 땅에도 이처럼 숫자를 붙인 얘깃거리들이 있다. 우선 회령에는 3미(美)가 전해진다. 회령오지.백살구.미인, 즉 토미(土美).행미(杏美).여미(女美)가 그것이다.

회령오지는 여느 옹기와 다르다. 회령 특유의 백토로 빚어 흰색 계통의 시원한 색깔을 띤다. 아름다울 뿐더러 가벼워 조선시대를 풍미했던 으뜸 옹기다. 그래서 '회령오지 뚝배기 장맛' 이란 말도 나왔다.

백살구는 씨가 행인(杏仁)으로 불렸고, 약재로 이름 높았다. 엿에 졸인 살구씨, 씨를 우려낸 행인수, 백살구 절임과 살구 무침, 살구로 담근 회령행주 등도 유명했다.

그 중에서도 아름다운 성품과 미모를 자랑하는 회령 미녀는 알아주었다. 남남북녀란 말이 그대로 해당되는 곳이 회령이다.

평양에는 평양냉면.대동강 숭어탕.평양 약밤의 '평양 3식(食)' 이 유명하다. 함흥냉면과 쌍벽을 이루는 냉면 맛을 지닌 평양냉면은 면발이 질기고 국물이 시원하면서 달다. 또 약간 새큼한 배맛이 잘 어울린다.

대동강의 명물인 숭어탕은 쇠고기.두부 등을 넣어 얼큰하고도 감칠맛이 난다. 술꾼들이 좋아할 만한 별식이다. 맛 좋은 약밤은 평양 근교 강서에서 많이 난다.

개성에선 화담(花潭)서경덕.황진이(黃眞伊).박연폭포라는 '송도 3절(節)' 이 널리 알려져 있다.

향토미에 숫자를 붙인 것은 북녘 땅만이 아니라 남녘에도 곳곳에 있다. 가령 제주도는 바람 많고 돌 많고 여자가 많아 3다도(多島)라 한다.

남북 분단의 햇수가 길어지면서 회령땅 3미는 커녕 회령이 대체 어디에 붙어 있는지조차 모르는 청소년이 늘어나고 있다. 3미는 그저 월남한 일부 노인층에게 추억거리로 남아있을 뿐이다.

우리 전래놀이에 전국의 자연 산천과 명승지를 돌아다니는 일종의 말판놀이인 남승도라는 것이 있다. 아이들이 놀이판에서 전국을 유람하면서 호연지기도 기르고 자연지리뿐 아니라 인문지리적인 생활 기풍을 이어받았던 것이다. 분단 이전의 전통시대에는 이런 '살아있는 지리교육' 이 존재했다.

'21세기 남승도' 를 만들어 한라에서 백두까지 지리교육부터 시켜보는 것이 어떨까. 지역 풍토에 녹아 있는 아름다움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보다 빠른 북한 문화 이해는 없을 터이기 때문이다.

주강현 <우리민속문화연구소장>

사진=김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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