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경찰수뇌 방탄용 성명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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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경찰대 동문회가 부평 대우차 노조원 폭력 진압 사태와 관련한 성명을 내는 과정에 이무영(李茂永)경찰청장의 비서실장이 개입한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주고 있다.

비서실장인 吉모 경감은 성명 발표 사흘 전에 경찰대 동문회장인 용산경찰서 黃모 경정에게 전화를 걸어 동문회 차원의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는 뜻을 전했고 기수 대표들 모임에도 한 차례 참석했다는 것이다.

경찰은 동문회장에겐 이번 사태와 관련해 모임이 필요하다는 전화가 잇따랐기 때문에 그의 제안만으로 동문 모임이 이뤄진 게 아니라고 해명하고 있다.

그러나 비서실장의 말 한 마디는 청장의 뜻이 담긴 것으로 오해될 수 있는 데다 그가 기(期)대표도 아니면서 대표 모임에 참석했다는 점에서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더구나 경찰청장 경질설이 나돌던 터라 수뇌부 의중이 반영된 것 아니냐는 의심마저 들게 한다.

이번 성명은 과잉 진압에 대한 반성 표현을 담고 있지만 폭력 진압에 대한 비판을 '경찰 흔들기' 로 규정, "이번 사건을 정략적으로 이용하려는 어떤 움직임도 단호히 거부한다" 고 밝히고 있다. 특히 경찰청장을 중심으로 추진해온 경찰 개혁 작업에 더 노력하겠다고 다짐하고 있어 청장을 바꾸지 말라는 의사를 분명히 했다.

또 경찰은 성명 준비를 사전에 감지했음에도 吉경감 개입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고 나서야 감찰 조사에 나섰다.

이런 일련의 사태 추이를 보면 실추된 공권력의 권위를 살리기 위한 경찰 내부의 충정이라기보다 몇몇 경찰 수뇌부를 살리기 위한 구명운동으로 비춰질 수도 있다. 이들에 대한 감찰 조사 결과도 징계 대신 서면경고로 끝낼 모양이다. 기강을 생명으로 하는 경찰 조직의 특성상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어떤 경우에도 공권력이 무력화해선 안된다. 그러나 폭력 진압으로 경찰 수뇌부 경질설이 나돌자 방탄용 성명서까지 만들어냈다면, 경찰에 대한 불신은 더욱 높아질 수밖에 없다.

경찰 수뇌부의 자리를 보전하는 것이 급한 게 아니라 실추된 공권력, 경찰의 권위를 바로 세우는 게 더욱 급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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