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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가능한 사회 만들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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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자연경관은 흔히 산.강.바다.바위처럼 우리 눈에 보이는 넓은 공간의 외형적 모습을 가리킨다. 경관은 이들이 지니는 독특한 선과 색이며 하루에도 이들의 모습은 시시각각 바뀐다. 화석이나 노출된 지층에 쓰여 있는 자연의 역사는 물론 노거수(老巨樹)나 고사목에 감추어진 세월의 무게도 자연경관의 일부다. 그러나 경관은 이처럼 하나의 시각적 현상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계절에 따라 다른 모습을 연출하는 식물과 동물, 그리고 이들이 만들어 내는 독특한 소리 또한 경관을 이루는 요소들이다. 따라서 낙엽을 밟으며 숲속 길을 산책하다 보면 하나의 경관적 체험을 하게 된다.

경관은 또 단순히 경관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집합만으로 이뤄지지 않고 이들이 서로 관계를 맺을 때 진정한 경관이 형성된다. 이른 봄 화창하게 핀 꽃을 쫓아다니는 벌이나 새들, 나뭇가지에 붙어 자라는 이끼, 가을철 숲속의 산란 개울로 회귀하는 연어는 각각 꽃.나뭇가지.숲과 관계를 맺고 있다.

경관 속의 관계는 먹이사슬.양분 순환.종족번식처럼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있지만, 숲을 뚫고 숲 바닥에 조용히 내려앉는 햇살이나, 석양에 물들어 미묘한 색깔을 보이는 산봉우리처럼 말과 글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도 포함한다. 경관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맺고 있는 관계에는 특별한 의도가 감추어져 있으며 모든 관계 속에는 질서가 존재한다.

위에서 말한 경관은 우리 밖에 존재하는 외적 경관이다. 우리 안에도 경관이 존재한다. 외적 경관이 우리 내면에 비춰지면 내면적 경관이 형성된다. 내면적 경관은 우리의 마음과 정신세계가 지니는 형태와 빛깔을 의미한다. 내면적 경관은 우리가 외적 경관의 아름다움을 음미하고, 그 경관 속에 감추어진 특별한 의도와 질서를 이해하는 바탕이 된다.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도 내면적 경관을 지닌다. 사회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가치관과 문화에 의해 그 사회의 내면적 경관이 형성된다. 마치 유전자에 의해 표현형이 만들어지듯 사회의 내면적 경관은 그 사회의 외적 경관을 결정한다. 외적 경관은 그 사회 구성원들의 가치관과 문화에 다시 영향을 미치면서 내적 경관을 결정짓는다. 한 사회의 외적 경관과 내적 경관은 이처럼 서로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에 있다. 따라서 우리 사회가 어떤 마음과 정신세계를 갖느냐 하는 것은 우리 밖의 자연경관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최근까지 외적 경관과 일치하는 내면적 경관을 지니고 있었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경관 속의 관계를 가장 잘 이해하고 그에 순응하는 삶을 살았다. 이들은 주문(呪文)을 외우며 경관 속에 숨은 의도를 파악했고 의식을 통해 경관 속의 질서를 파괴하려는 욕망을 억제했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이 같은 내적 경관을 가꿀 수 있었던 것은 주위에 파괴되지 않은 외적 경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파괴되지 않은 외적 경관은 숨은 의도와 질서에 따라 움직이는 지속가능한 경관이었다. 수천년 동안 지속돼 온 외적 경관에 의해 아로새겨진 이들의 내적 경관 역시 당연히 지속가능한 것이었다.

우리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수천년 동안 이어져 내려오던 농경문화에 바탕을 둔 비교적 지속가능한 경관 속에서 살았고 우리 내면의 경관 역시 비교적 지속가능한 상태를 유지했다. 그러나 불과 한 세대 남짓 만에 지속가능했던 전통경관이 산업화 또는 도시화한 경관으로 바뀌면서 지속성을 잃게 되었다. 지속성 상실은 외적 경관에 국한하지 않고 우리의 내면적 경관에까지 확대되었다.

우리 사회를 지속가능하게 만들기 위한 노력이 경제.사회.문화적 측면에서 다각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지속가능성을 위한 노력의 성공 여부는 우리의 외적 경관을 얼마나 지속가능하게 유지하느냐에 달려 있다. 지속가능성은 우리 인간의 노력에 의해 이뤄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우리를 지속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탁광일 생태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