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우리를 부끄럽게 한 찰스 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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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찰스 킹. 그는 부자가 아니다. 항공우주 관련 회사인 레이시온에서 8만달러 가량의 연봉을 받는 미국의 평범한 중산층 샐러리맨일 뿐이다. 오전 5시부터 오후 2시까지 직장일을 하고 귀가해서는 집안일을 돌본다. 12명의 식구 가운데 입양아 6명이 이런저런 신체결함을 안고 있는 장애아여서 하루 4시간밖에 자지 않고 일해도 아내 혼자 감당하기엔 벅차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버린 오인호군을 '애덤 킹' 으로 부활시킨 찰스 킹은 이처럼 평범한 사람이었다. 단지 그에겐 우리네 가정과 같은 가족이기주의 대신 인간에 대한 끝없는 사랑이 있다는 것만이 달랐다.

찰스 킹의 등장은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모습이 낱낱이 드러나게 만들었다. 6.25가 끝난 지 48년이 돼 가고, 세계 11위의 경제 규모를 자랑할 정도가 됐음에도 여전히 고아 수출국인 한국. 1958년 이후 입양아의 71%를 해외 가정에 보낸 나라. 전쟁 고아가 자취를 감춘 오늘날에도 여전히 아이를 버리는 사회. 부모의 이혼이나 가출로, 혹은 미혼모에 의해 버려져 아동복지시설에 수용된 아이들이 98년 한해만도 8천8백명이 넘는 나라.

지금껏 우리 사회는 새로운 인생 설계에 걸림돌이 된다고 해서 아이를 버리는 이들에 대해 비난만을 해왔다. 그러나 찰스 킹의 행적은 우리에게 남을 비난하기에 앞서 '죄없는 아이들' 을 함께 책임지려는 의식이 없음을 부끄러워해야 함을 일깨워주고 있다.

선진국의 경우 아이들을 보호시설에서 자라게 하는 것은 아동 학대라는 인식이 자리잡아 고아 수용시설이 없어져 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엔 1만8천명(98년 현재)의 아이들이 이들 기관에 머물러 있을 정도다. 98년 한 해 동안 우리 가정의 품에 안긴 아이들은 1천4백26명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찰스 킹의 선행 앞에 너무나 초라하기만 하다. 뿌리 깊은 순혈 가족이기주의에서 벗어나 이들에게 새 가정을 만들어주는 데 우리 모두 동참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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