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아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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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구준(寇準)은 중국 송나라 4대 황제인 인종 때 재상을 지낸 사람이다. 그가 널리 구해 조정에 천거한 인물 가운데 정위(丁謂)란 자가 있었다.

어느날 구준이 정위를 비롯한 중신들과 회식을 하는데 음식이 그의 수염에 달라붙었다. 이걸 본 정위가 벌떡 일어나 옷소매로 구준의 수염에 붙은 음식물을 공손히 닦아냈다. '불수진(拂鬚塵)' 이란 고사성어가 여기서 생겼다.

말 그대로 하면 '수염에 붙은 티끌을 털어준다' 는 뜻이다. 염치와 체면을 안가리고 윗사람에게 아첨하는 비굴한 태도를 가리킨다. '릭 더 더스트(lick the dust)' 란 영어 표현과도 통하는 데가 있다. 상대방에게 묻은 먼지를 혀로 핥아 닦아줄 정도로 바짝 엎드려 아부하는 것이 '릭 더 더스트' 다.

비슷한 한자성어로 '인분의 맛을 본다' 는 뜻의 '상분(嘗糞)' 이 있다. 중국 당나라에 곽홍패(郭弘覇)란 사람이 있었다. 그가 시어사(侍御史)란 벼슬을 할 때였다.

상관이 병을 앓자 동료들은 어울려 함께 병문안을 했다. 그러나 곽홍패만은 혼자서 따로 갔다. 몸져 누운 상관의 대변을 청해 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보더니 "다행히 맛이 쓰니 곧 쾌차하실 것입니다" 라고 상관을 안심시켰다. 수치를 모르는 철면피한 아첨꾼의 극치라고나 할까.

남을 위한 달콤한 말은 칭찬이지만 나를 위한 달콤한 말은 아첨이다. 칭찬은 많을수록 좋지만 아첨은 아낄수록 좋다.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아첨하는 자가 가장 무서운 적" 이라 했고, 중국의 순자(筍子)는 "내게 아첨하는 자는 나를 해칠 자" 라고 했다.

소크라테스는 "사냥꾼은 개로 토끼를 잡지만 아첨꾼은 칭찬으로 우둔한 자를 잡는다" 고 했다. 나폴레옹은 "아첨을 잘하는 사람은 비방도 잘한다" 고 경고했다. 그만큼 아첨에 약한 게 인간이다.

야당의 한 국회의원이 자기 당 총재를 가리켜 '왕이 될 사람' 이라고 해서 화제다. 지금은 이 나라가 혼란스럽지만 내년 12월이면 자기 당 총재가 왕이 돼 어려움이 말끔히 해소된다나 어쩐다나. 얼마 전에는 '한마리 연어' 가 우리를 웃기더니 이번에는 때아닌 '왕기론(王氣論)' 이 우리를 실소케 한다.

따지고 보면 정치라는 게 대중에 대한 아첨이 아니냐고 항변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이건 물어봐야겠다. 『신곡(神曲)』을 쓴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작가 단테가 작품 속에서 폭군과 살인자를 위한 지옥을 만들고 그 옆에 여덟번째 지옥을 지었는데 그게 누굴 위한 건지 아시느냐고.

배명복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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