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정세 본질을 물은 '이제 미국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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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망명 30여년째인 재일 정치평론가 정경모(77)씨는 국내 독자들에게 무엇보다 『찢겨진 산하』의 저자로 기억된다. 80년대 질풍노도의 시절 해적판 번역본으로 선보였던 이 책은 김구.여운형.장준하 3명이 해방공간을 짚어보며 민족의 앞날을 논한 가상대담의 저술이었다. 세명의 그 혼령들을 '구름 위에' 불러들였던 주인공이 정경모였다.

이번 신간에 서문을 쓴 시인 고은도 『찢겨진 산하』를 '전설적인 역저(力著)' 라며 깍듯한 예를 표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정경모의 신간 『이제 미국이 대답할 차례다』는 몇해 전 펴낸 『일본의 본질을 묻는다』(창작과 비평사) 이후 그가 발표했던 정치평론 글들을 모은 것이다. 그가 일본에서 발간하는 『씨알』 등에 실렸던 한반도 정세와 북한.일본.미국 등의 움직임을 분석하고 있다.

분석의 내용이나 방향은 저자의 이력과 캐릭터 때문에 당연히 비판적이다. 그가 각별히 존경하고 내면화하고 싶어하는 '역할 모델' 들인 여운형.김구.장준하가 오늘을 살았다면 던졌을 법한 발언이 툭툭 튀어 나온다. 당연하다. 정치학자 김학준의 분석틀에 따르면 '좌파 민족주의' 성향에 속하는 발언이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제도 정치권에서 오랫동안 언급해온 '한일 친선' 에 대해 정경모는 이렇게 독설을 던진다.

"일본의 속셈을 모르는지 한국인 중에도 일본인과 어울려 친선을 외쳐대는 얼간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외교관료의 말대로 '일본에 한국은 장(將)을 지키는 차(車).포(包)' 일 뿐이다. '졸(卒)' 이 아니라 다행일까?

요컨대 북한을 친다는 목적의 수단이 한국이라는 뜻일 테지요. " (166쪽)

당연히 정경모는 "모든 통일은 좋다" 는 발언을 했던 장준하의 통일지상주의에 따라 지난해 뚫린 남북관계의 돌파구에 대해 열광한다. 6.25, 현대사, 그리고 미국을 바라보는 시선도 부르스 커밍스의 수정주의사관을 빼다 꼽고 있지만, 이는 독자들이 알아서 판단할 일이다. 수록 글들은 저자가 고령인 탓에 다소 산만하지만, 단박에 감지되는 형형한 눈빛은 아직도 날이 시퍼렇게 서있다.

책의 한곳에서 그는 자신의 개인사를 '좌우익의 협곡에서 축구공처럼 이리저리 채였다' 고 술회했지만, 그는 실은 목사 집안 출신. 경기중 출신으로 게이오대에서 의학을 공부했다. 이후 이승만의 도움으로 미국에서 화학을 공부하다가 장면 당시 주미대사의 부름으로 휴전회담에서 통역을 맡으며 한국정치의 현장에 들어왔고, 이후 좌파성향의 정치 평론가로 돌아섰다. 일본 망명은 1970년의 일이다.

조우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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