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노재현 시시각각

인권 침해하는 인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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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지난달 헌법재판소가 사형제 위헌법률 제청 사건에서 5대4로 아슬아슬하게 합헌 결정을 내렸다. 나는 정치범 등을 제외해 좁게 적용하는 방식으로 사형제를 유지하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사형제에 찬성하든 반대하든 한 가지 의견이 일치되는 대목이 있었다. 위헌법률제청을 재판부에 요구한 피고인 오모(71)씨의 혐의에 대해서다. 3년 전 전남 보성 앞바다에서 20대 남녀 젊은이 4명을 바다에 밀어넣어 참혹하게 살해한 세칭 ‘노인과 바다’ 사건의 장본인이다. 악역을 맡은 문성근의 연기가 돋보이는 영화 ‘실종’의 라스트 신에도 이 사건을 연상케 하는 섬뜩한 장면이 나온다. 만의 하나 오씨가 진범이 아닐 경우를 배제하고 한 얘기지만, 나와 친구들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 노인이 사형을 면하겠다고 나서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입을 모았다. 더구나 오씨의 아들은 사건에 충격 받아 자살했다지 않은가.

생명이든 재산이든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 그럴수록 남의 욕망, 남의 상처도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 나는 전국 교도소에 수감돼 있는 사형수 59명이 부산 여중생 살해 피의자 김길태가 검거됐다는 소식을 듣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 사형 집행 가능성이 커지게 만든 김길태를 원망할지, 아니면 또 한 명의 흉악범이 생겨난 것을 가슴 아파할지.

국가인권위원회가 최근 펴낸 『08~09 인권상담 사례집』을 보면 우리 사회 곳곳에 인권 사각지대가 얼마나 많이 남아 있는지 실감할 수 있다. 특히 사회·경제적 약자가 겪는 인권침해 천태만상(千態萬象)은 우리가 아직 멀었구나, 라는 느낌을 준다. 동시에 인권의식이 모르는 사이에 무척 향상되었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다. 웃음을 머금게 하는 상담 사례도 있다. “학교랑 뉴스에서 인권위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서 전화했다”는 초등학교 4학년 학생은 “친구가 자전거를 타다 넘어져 다쳤는데 코피가 난다. 주위에 도와줄 어른들이 없다”며 상담을 청했다. 인권위 직원은 친절하게도 “찬 수건을 콧등에 얹고 등 마사지를 하라”고 일러주었다.

그러나 머리를 갸우뚱거리게 하는 사례들이 있다. 상담을 요청한 K대학 총학생회 사무국장은 “학교에서 또각또각 소리가 면학 분위기를 해친다며 하이힐을 신은 여학생을 도서관에서 퇴출시킨다”고 호소했다. 이 학교에서는 슬리퍼를 나누어 주고 개인 사물함도 설치한 모양이다. 하지만 사무국장은 그런 게 ‘불필요한 설비’라며 “애초 여학생의 의복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게 문제이고 성차별 요소도 있다. 총학생회는 촛불집회를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인권위 상담자는 “우리 위원회에 진정해 판단을 받아보라”고 답했다. 적어도 사례집의 내용으로만 판단할 때 나는 하이힐 출입금지가 과연 촛불집회 감인지 의문이다. 남학생의 구두소리도 함께 규제하라고 해야 옳은 것 아닐까. 학교 측에서 슬리퍼까지 준비했다는데 굳이 하이힐을 고집해야 하나. 남에게 피해를 주는 ‘자기결정권’이 정당화될 수 있을까.

결국은 상식이다. 나의 인권은 반드시 남의 인권과 동행해야 한다. 길에서 남을 밀치고도 사과할 줄 모르는 학생들, 자기가 연 문에 뒷사람이 부딪쳐도 아랑곳하지 않는 어른들을 보면 국가인권위 옆에 ‘국가매너위’라도 세워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인권을 침해하는 인권’은 횡포일 뿐이다. 나만 앞세우면 우리는 ‘인권의 정글’에서 끝없이 피투성이 싸움을 벌일 수밖에 없다.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