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배 칼럼] 무엇을 위한 개혁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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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최근 의료보험재정의 파탄 원인을 둘러싸고 설왕설래가 한창이다.

일부에서는 의사들의 파업을 구슬리기 위해 수가(酬價)를 너무 올린 탓이라고 하고 다른 쪽은 의보통합을 앞두고 재정을 함부로 펑펑 써버린 탓이라고 한다. 일부에서는 의사들의 과잉청구를 제대로 심사도 않고 마구 퍼주다 보니 그렇게 됐다고 주장하면 또 다른 쪽은 약품의 랜딩비(費)니 고급약의 과잉처방과 같은 의약계의 내부 부조리를 지적한다.

*** 少數 ·급진정책으론 실패

아마 모두가 다 일면적인 진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곳간이 가득해서 좀 나눠쓰기로 한 것이 아니라 곳간이야 비었든 말든 우선 몽땅 함께 나눠야 한다는 평등주의적 분배론이 재정 펑크의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의료보험은 시장경제의 원칙을 따르는 미국이든, 사회주의적 복지정책을 펴고 있는 유럽 각국이든간에 국가재정의 가장 큰 부담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부담을 어떻게 질 것이냐는 문제를 놓고 분배의 정의부터 실현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을 수 있고 또는 수익자부담이라는 시장경제적 원칙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의보통합론자들은 샐러리맨이야 봉이 되든 말든, 자영업자의 소득파악이 되든 말든 우선 소득분배를 확대하는 제도부터 서둘러 도입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복지정책의 한계를 넘어선 '좌파적 급진성' 이 엿보인다는 말이다.

지금 DJ정부가 추진하는 '개혁정책' 들 중에서 의약분업은 시행 몇달 만에 당장 보험재정이 거덜났으니 문제가 드러난 것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예컨대 평등교육정책과 같은 것은 장기적으로, 그리고 덜 가시적으로 그 결과가 나타날 것이다. 그 결과 교육파탄이 일어날 경우 아마도 엄청난 국가적 손실을 초래하겠지만 그때는 책임을 묻기엔 너무 늦을 수도 있다.

이른바 '이해찬 세대' 라는 말로 대변되는 저학력의 가치파괴적 세대가 우선은 그 첫 결과일 수 있다. 그러나 기성의 교육가치를 무시하는 이런 저학력 평준화사태에 대한 불만으로 교육이민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데 대해 이들 '개혁세력' 들은 그것은 평등교육정책과는 무관하다고 뻗대고 있다.

이들은 또 사립학교법을 고치겠다고 한다. 사립학교의 모든 인사권을 사실상 교원들에게 넘기라는 게 골자다. 사립학교들 중에는 재단의 전횡과 비리에 시달리는 곳이 있긴 하다. 그러나 그런 비리를 이유로 재단 자체의 소유권을 내놓으라는 것은 사회주의적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지금 '개혁' 이라는 이름으로 추진되는 것들은 결국 소유구조에 대한 문제로 귀착된다. 재벌의 문제는 그 구조의 부실과 내부거래보다는 소유주의 황제적 행태와 족벌구조의 문제로 치환돼 버린다. 사학개혁도, 언론개혁도 모두 소유구조가 그 표적이다.

그렇다면 이런 개혁은 어떤 개혁인가. 이 정부가 출범하면서 내걸었던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는 어디로 사라진 것인가. 아니면 그것은 위장에 불과했던가.

이 정부는 소수 정부다. 이들의 개혁안도 소수 개혁안이다. 그 중에서도 '급진적' 인 개혁안은 청와대와 당에 포진한 일부 진보적 시각을 대변하는데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다수의 지지를 받지 못했던, 아무런 합의절차가 없었던 이런 소수 개혁정책을 다수의 중산층을 상대로 실험하다가 오늘의 교실 황폐화와 의보 재정파탄이 빚어진 것이 아닌가.

*** 국민적 합의 먼저 구해야

만약 DJP 공동정권이 존립할 수 있는 정치적 이유가 굳이 있다면 적어도 그런 '급진성' 에 대한 조정가능성이어야 한다고 우리는 본다. 그러나 만약 DJP공조가 단순히 권력을 공유함으로써 이득이나 나누겠다는 '이문공조' 에 그친다면 우리는 한쪽에는 합의되지 않은 소수 개혁의 강행책임을, 다른 쪽엔 권력의 공유대가로 정치적 노선을 포기한 무책임의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과거 수많은 개혁을 거쳤다. 5공, 6공 군부정권도 정치개혁을 외쳤다. YS개혁은 부패를 척결하겠다는 사정(司正)개혁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DJ개혁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만약 소수의 급진적 시민단체를 앞세워 좌파적 평등주의 개혁을 밀고나가는 것이라면 그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구하는 절차를 따로 거쳐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권력의 공유로 확보한 수적 우위로 이를 밀어붙이려 한다면 그것은 위장된 개혁이며 정당하지 못한 개혁이다. 엊그제 이뤄진 당과 내각의 개편은 우리에게 그런 우려를 더하게 한다.

김영배 <논설위원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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