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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밟는 자, 나라 밟는다” … 서울 종로 거리서 축첩 반대 시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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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우리 여성은 축첩자에게 투표하지 않는다’ ‘축첩자에 투표 말라. 새 공화국 더럽힌다’ ‘아내 밟는 자, 나라 밟는다’. 제2공화국이 세워지기 직전인 1960년 7월 19일 축첩 반대 플래카드를 펼쳐 들고 서울 종로로 나선 전국 여성단체연합회 회원들의 시위행진 모습.(한국가정법률상담소, 『가족법개정운동 60년사』, 2009)

오늘은 ‘세계 여성의 날’. 여성의 입장에서 본 근대는 산업화의 와중에서 남녀동권을 얻기 위해 긴 싸움이 일어났던 시기다. 현모양처라는 미명 아래 여성을 여전히 민족을 이끌 ‘일등 국민’인 남성들을 낳고 기르고 돌보는 종속적 존재로 얽어 매어 놓으려던 일제 치하. “남편을 보필하여 아들을 훌륭히 키우라”는 주술에서 놓여나 당당히 욕망의 자유와 몸의 주권 찾기와 남성과 동등한 사람 되기에 나선 신여성들이 등장했다. 애정과 사랑에 바탕을 둔 결혼이라는 근대 가정의 이념은 일부일처제였다. 그러나 신여성들이 사랑할 만한 남성들은 이미 본처가 있었다. 사랑을 좇아 첩이 된 신여성들과 전통의 희생자인 본처 사이에 ‘처(妻)’의 자리를 놓고 각축전이 일던 그 시절. 힘 있는 남성들이 부모가 맺어준 처와 이혼하고 연애와 사랑이 있는 첩을 처로 삼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났다. “‘사랑걸신증’이라는 성적 박테리아가 방방곡곡을 휩쓸어서 인심이 자못 퇴폐한 모양이오. 이에 따라 이혼·야합이라는 희비극이 날을 따라 도처에 연출되는 모양이오”( 염상섭, ‘감상과 기대’, 『조선문단』, 1925). 전통 결혼제도와 사랑을 좇는 자유연애가 충돌하던 그때. 축첩제(蓄妾制)는 이미 흔들리기 시작했다.

‘대한민국은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자유·평등과 창의를 존중하고 보장하며 공공복리의 향상을 위하여 이를 보호하고 조정하는 의무를 진다.’ ‘혼인은 남녀동권을 기본으로 하며 혼인의 순결과 가족의 건강은 국가의 특별한 보호를 받는다.’ 제헌헌법 제5조와 제20조가 웅변하듯이, 양성 평등사회와 근대적 일부일처제가 구축되는 상황에서 ‘첩’이 서 있을 자리는 점점 좁아졌다. “과거 봉건사회에서는 조혼이라는 개인의사를 무시한 결혼방식 때문에 축첩이란 것도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발달한 다양한 개성을 존중하는 현대사회 구조에서 선택의 자유를 갖고 있는 개인이 축첩을 하거나 첩살이를 한다는 것은 자유민주사회의 기본질서를 침해하는 것이다. 더욱 지도자층의 축첩한 남성들에게 묻고 싶은 것은 자기 문제를 처리하지 못하는 사람이 누구를 위하여 봉사하며 희생할 수 있을까 의문이다(동아일보 1960년 12월 29일자).”

4·19혁명 이후 ‘민주주의의 황금시대’를 연 제2공화국의 장면 정부는 여성단체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이듬해 2월 첩을 둔 공무원들에게 철퇴를 내렸다. 이제 축첩은 더 이상 부와 권력의 상징이 되지 못했다. 2008년 1월 1일을 기해 일제 치하에 도입된 가부장권의 마지막 보루 호주제가 폐지되었지만, 진정한 양성평등사회가 펼쳐지기까지 남녀가 함께 넘어야 할 산자락은 아직도 많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