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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사람들은 통제불능 …” 약탈·방화 지친 대학생 자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2면

“칠레 사람들은 스스로 통제할 수 없다는 게 입증됐어요. 이럴 거면 72시간이나 지체하지 말고 빨리 군대가 들어왔어야 했어요”

칠레 지진의 최대 피해지역 콘셉티온. 4일(현지시간) 낮 기록적인 지진에 이어 약탈과 방화, 소요 끝에 군 투입으로 ‘타율적’인 안정을 찾아가고 있는 이곳에서 만난 시스테르나는 스무 살 대학생답지 않게 자조적인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기름을 사기 위해 두 시간째 주요소에서 기다린 그는 “지진은 지나갔지만 사람들의 불안해진 마음은 남았다”고 토로했다. 이곳에서 두 블록 떨어진 곳엔 약탈자들이 불을 질러 완전히 타버린 백화점 내부를 시 경찰이 수색하고 있었다.

황폐해진 콘셉시온은 2일부터 한 달 동안 오후 6시부터 다음 날 정오까지 통행금지 조치가 내려진 상태다. 관청·은행·주유소 등 시내 곳곳에는 무장 군인들이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다. 신호등 불마저 제대로 들어오지 않아 교통정리도 이들 몫이다. 이런데도 20대로 보이는 한 남자가 겁도 없이 편의점을 털려다 붙잡히는 모습이 목격됐다.

밤이면 촛불을 켜고 온 가족이 모여 라디오를 듣는다는 50대 공인회계사 루이스 펠리스는 “지진 발생 이후 군대 파견 말고는 중앙 정부가 한 일이 없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지진 후유증이 칠레의 정치적·사회적 지형에 큰 변화를 가져올 게 틀림없어 보였다. 때마침 칠레는 11일 중도 좌파 정권이 물러나고 20년 만에 우파 정권이 들어선다.

아주 조금씩 도시 기능을 회복 중인 콘셉시온의 낮은 어디서건 끝없이 긴 행렬의 연속이었다. 4일에는 국영은행과 소형 버스 운행이 정상화됐고, 생필품을 파는 대형마트 ‘리데르’도 첫 영업에 들어갔다. 그러자 지진이 일어난 지난달 27일 이후 돈을 찾지 못했던 콘셉시온 주민들이 일제히 은행에 몰렸다. 또 문을 닫았던 약국·마트가 영업에 들어가자 시민들은 즉각 의약품과 생필품을 확보하기 위한 순례에 나섰다. 여기에 물과 자동차 및 가정용 발전기에 쓰기 위한 기름을 얻으려는 사람들까지 몰려나와 시내 중심가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자동차를 가진 주민들은 한 푼의 기름을 아끼기 위해 가족이 함께 차를 밀면서 전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게 전부였다. 일부 은행·약국·편의점 외엔 모든 업체가 여전히 문을 열지 못했다.

이날 콘셉시온을 찾은 미첼 바첼레트 대통령은 현지 라디오 회견을 통해 재해 복구에 3~4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했다. 그는 “인프라가 완전히 파괴된 지역이 있다”며 “국제사회의 지원을 받아들이겠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지진 피해가 최대 300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는 칠레 국내총생산(GDP)의 15%에 해당하는 규모다.

사회 인프라가 크게 파괴됐다는 대통령의 실토는 콘셉시온 시내뿐 아니라 수도 산티아고로 향하는 고속도로에서도 여실히 느껴졌다. 진앙지에서 수백㎞ 떨어졌는데도 리오 클라로라는 다리가 통째로 강 밑으로 무너져 내렸다. 약 500㎞에 달하는 산티아고~콘셉시온 구간에서 길바닥이 꺼지거나 솟아오른 곳, 금이 간 곳은 셀 수 없을 정도였다. “도대체 땅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라는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

김정욱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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