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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옴부즈맨 칼럼] 피의자 실명처리 신중해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국내 신문들은 범죄사건을 그 자체가 갖고 있는 갈등성의 뉴스가치 때문인지 아직도 사회면의 주요 기사로 다루고 있다.

지난주 중앙일보의 사회면에도 연일 크고 작은 범죄 관련 기사가 게재됐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기사를 다루는 데 있어서 양의 많고 적음을 떠나 범죄사건을 어떻게 보도해야 하는가의 명확한 원칙과 기준이 마련돼 있지 않은 데 있다.

같은 구속사건이라 할지라도 어느 경우에는 피의자의 이름과 직장명을 다 밝히는가 하면(2월 27일자 27면 '근무회사 기술 빼내 벤처 차리려다 덜미' ), 같은 날짜 같은 면의 다른 기사( '남의 이름 카드 발급 1억5천만원 빼내' )에서는 구속된 피의자를 박모씨라는 익명으로 처리하기도 했다.

또 '체대특기생 선발 때 1억 받아/빙상스타 이영하 교수 구속' (3월 1일자 27면)이라는 기사를 보면 구속된 사람은 실명과 직장명을 모두 밝혔고, 구속영장이 신청된 사람은 이름은 밝히고 직장명은 S여대로 표기했으며, 불구속 입건된 사람은 이름과 직장명을 모두 영문 이니셜로 표기했다.

범죄행위의 경중에 따라 차등을 두고 이름을 밝히고 안 밝히고 한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신문이 벌써 나름대로 '신문재판' 을 했단 말인가? 유죄.무죄의 판정은 두말할 것도 없이 법원이 해야 한다.

경찰의 수사보고서만을 근거로 마치 용의자에게 유죄 확정 판결을 내리듯 기사화하는 것이 이같은 신문재판의 특징이고 지금까지 범죄 사건 보도에서 빈번히 있어왔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처음부터 범죄사건 용의자의 실명을 밝히는 데 있다. 사회적 파장이 좀 크다 싶으면 용의자의 이름뿐 아니라 생활주변 등 프라이버시(사생활)에 관계되는 사항까지 조사해 상세히 밝히곤 한다.

실명을 밝히는 것은 그것이 공익에 관계되는 사항이거나 저명한 공인의 경우로 한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에는 '국민의 알 권리' 를 내세울 수 없는 것이다. 실명 보도는 인권을 침해하는 경우가 오히려 대부분이다. 실명을 밝히는 대신에 범죄의 성격이나 그 부정적 영향에 초점을 두는 것으로 범죄사건 보도방식을 바꿔야 한다.

이름을 밝히지 않고 어느 연령의 어떤 경력의 인물인가만 밝혀도 국민의 알 권리는 충분히 지켜지는 것이다. 재판을 거치기 전에는 극히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면 실명을 밝히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영국 등 대부분 선진국의 범죄사건 보도방식을 우리도 참조하는 것은 어떨까.

중앙일보 하면 교육 관련기사가 강점이다.

매년 실시하는 대학평가 등으로 인해 중앙일보의 교육 관련기사는 영향력이 있고 그만큼 신뢰도도 높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고교 내신 뻥튀기 23% '수' 줬다" (2월 26일자 30, 31면) 기사는 다른 신문들이 보도하지 않은 내용으로 시의성이 있고 영향력이 클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 기사를 과감히 1면 머리기사로 올리기에는 약하다고 판단했던 것일까?

대학입시는 첨예한 국민적 관심사이며, 내신성적 잘 주기의 문제는 그만큼 사회적 파장이 크고 독자의 관심을 끄는 사안임을 감안할 때 더 크게 다뤄 사회적 쟁점으로 부각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당일 1면에는 북한 관련 기사가 세 개나 될 정도로 많았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박천일 <숙명여대 교수.언론정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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