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비공 하나로 치유하다, 분열·적대·갈등의 상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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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1995년 럭비월드컵에서 남아공팀은 기적 같은 승리를 일군다. 이 실화를 영화화한 ‘인빅터스’는 남아공 행정수도 프리토리아의 정부청사와 만델라가 수감됐던 로벤섬 교도소, 실제 럭비경기가 열렸던 요하네스버그 엘리스파크 스타디움 등에서 100% 촬영됐다.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제공]

스포츠로 하나 되기. 최근 밴쿠버 겨울올림픽을 통해 익히 경험했던 바다. 스포츠 문외한도 갑자기 전문용어를 줄줄 읊고, 애국심에 큰 감흥 없던 사람들도 태극마크만 보면 가슴이 쿵쿵 뛰었다. 스포츠의 힘이다. 그런데 스포츠가 인종갈등도 치유할 수 있을까. 아니, 국가통합에 이바지할 수 있을까. 피식 웃어넘길 일이 아니다. ‘우리가 꿈꾸는 기적 : 인빅터스’(4일 개봉)를 보면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 1995년 남아공 럭비월드컵 결승전에서다.

넬슨 만델라(모건 프리먼)가 남아공 최초의 흑인대통령으로 취임한 94년이 무대다. 그는 화해와 화합을 부르짖지만 흑백 갈등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안타까워하던 대통령의 눈에 럭비대표팀 스프링복스가 들어온다. 당시 스프링복스는 흑백대립의 절정이었다. 흑인선수가 딱 한 명뿐이라 흑인들은 스프링복스와 외국팀이 경기하면 외국팀을 응원할 정도였다.

만델라는 팀 주장 프랑수아(맷 데이먼)를 불러 “1년 후 월드컵에서 우승해달라”고 당부한다. 사람들을 단시간에 하나로 질끈 묶어주는 스포츠만의 위력에 베팅을 건 것이다. 사실 이건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스프링복스는 존폐 위기에 놓인 세계 최약체팀이었으니까. 그런데 이변이 일어난다. 출전국 자격으로 본선에 자동 출전한 월드컵에서 스프링복스가 우승컵을 안은 것이다. 상대는 뉴질랜드 역대 최강팀이었다. 예상치 못한 승리는 남아공 국민을 피부색과 상관없이 서로 얼싸안게 만든다.

‘인빅터스’는 사실 범작이 되기 십상인 영화다. 스포츠 승부와 예상을 깬 결과, 만델라라는 역사적 인물의 개입 등 스포츠영화와 전기영화로서 드라마틱한 요소가 지나칠 정도로 많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

하지만 클린트 이스트우드(80) 감독이 누군가. 지난해 ‘체인질링’과 ‘그랜 토리노’에서 절제하는 감동의 여운이 얼마나 오래가는가를 보여줬던 그는 감동코드를 싹 무시하지도, 그렇다고 옳다구나 있는 대로 부각시키지도 않는다. 담담하면서도 유머 감각을 잃지 않은 채 그날의 ‘기적’을 재구성한다. 결승전도 승부의 드라마틱한 디테일에 치중하기보다 육체와 육체의 부딪힘, 허공에 튀는 땀방울, 선수들의 짐승 같은 울부짖음 등으로 채운다. 그래서일까. ‘위인의 영감을 받아 변화하는 범인(凡人)들’이라는 주제는 외면하고 싶은 싸구려 감동이 아닌, 간직하고 싶은 잔잔한 여운으로 남는다.

이 영화는 리더십에 대한 훌륭한 텍스트로 삼음직하다. 만델라가 프랑수아를 초대해 19세기 영국 시인 윌리엄 어니스트 헨리의 시(영화 제목은 시 제목에서 딴 것이다)를 읽어주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온 세상이 지옥처럼 캄캄하게 나를 엄습하는 밤 속에서/나는 어떤 신들에게든 내 굴하지 않는 영혼을 주심에 감사한다. 나는 내 운명의 지배자요, 내 영혼의 선장’. 우리 지도자들도 제발 “기대치 이상을 뛰어넘으려면 지도자는 영감을 줘야 한다”는 만델라의 얘기를 귀담아들으시길.

‘인빅터스’는 사실상 두 ‘노인’의 파워가 집결한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델라처럼 연기하는 게 아니라 만델라가 되는 것”이 목표였다는 모건 프리먼(73)은 총제작을 겸한 이 작품으로 7일 열리는 제82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온화한 성품뿐 아니라 신나면 엉덩이를 슬쩍 흔드는 지도자의 귀여운 면모까지 섬세하게 표현해냈다.

지난해 ‘그랜 토리노’도 그랬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올해 만 팔순의 노장 감독에게 차라도 한 잔 나누며 그 지혜를 경청하고 싶어진다. 70대에 들어 감독으로서의 전성기를 시작했던 그는 자신의 눈 아래 패인 주름살만큼이나 깊고도 깊은 세월의 힘을 영화 곳곳에 새겨놨다. 젊음을 끝없이 찬양하는 게 대세라지만, 아직도 세상에는 나이 들었기에 보여줄 수 있는 무언가가 분명 있다. 전체 관람가. 

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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