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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emulpo'로 세계무대 첫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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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호 26면

19세기 중엽 중국·일본에 진출했던 서구 열강은 조선에도 통상(通商)을 요구하면서 수도 한양의 목구멍[咽喉] 같은 인천 해안으로 밀려들었다. 서양세력의 끈질긴 진출 시도와 이를 저지하려는 조선의 해금(海禁)정책은 끝내 인천 해안에서 군사적 충돌을 일으켰다.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가 그것이다. 일본은 조선 진출의 기선을 제압하려 1875년 이른바 운양호 사건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를 빌미로 맺은 '강화도조약'에 따라 1883년 인천이 개항됐다. 일본과 청나라는 물론 미·영·독·프 등이 몰려들었다. 인천이 제물포(Chemulpo)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에 알려진 시발점이다. 원래 제물포는 지금의 인천항 주변 중앙동·항동 일대에 있던 작은 나루를 가리켰다. 조선시대 군사용 진지 제물량(濟物梁)에서 유래한 것이다. 개항 후 서양인은 인천을 제물포, 일본인은 진센(Jinsen·仁川)으로 불렀다.

시대 따라 달라진 이름, 제물포→진센→인천

개항장에는 각국 영사관과 외국인 거류지가 들어섰다. 응봉산을 중심으로 각국의 공원이 조성되고 주변에 청국 조계, 일본 조계, 각국 공동 조계가 생겨났다. 서구식 상공업시설과 종교·교육·문화시설도 빠르게 건설됐다. 당시 제물포를 중심으로 정치·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던 외국인들의 외교활동을 이른바 ‘제물포 정략(Chemulpo Politics)’이라고 표현한 것은 인천 개항장의 비중을 드러낸다.

근대문물이 이식되면서 개항장은 국제적인 도시로 변화했다. 특히 독일계 무역상사인 세창양행의 기숙사 건물, 해관의 통역관이었던 중국인 오례당(吳禮堂)의 저택, 해관장을 지낸 존스톤의 별장, 북성동의 외국인 묘지는 조선인들이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문물이었다. 서울 정동의 손탁호텔보다 먼저 세워진 최초의 서양식 대불호텔과 경인철도(1899), 하와이 이민(1902), 팔미도 등대(1903) 등은 근대화의 상징이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면서 개항장 일대는 점차 일본색으로 탈바꿈했다.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천부(仁川府) 가운데 일본인 시가지는 넓어지는 대신 한국인 거주지는 줄어들었다. 나머지 농어촌 지역은 부평을 중심으로 신설된 부천군(富川郡)에 편입됐다. 각국 공동 조계와 청국 전관조계도 모두 철폐되고, 하부 행정조직은 일본식인 정(町), 정목(丁目)으로 바뀌었다.

일제는 대륙 침략정책을 추진하면서 부역(府域)을 더욱 확대했다. 병참·식량기지로 개발하기 위한 것이었다. 중일전쟁(1937) 뒤 경인 시가지 계획을 마련해 일제는 경성부(京城府)의 서남단에서 인천부의 동북단에 이르는 350㎢의 지역에 7개 공단과 11개 거주지를 건설했다. 또 김포·부평평야를 절대농지로 지정했다. 개항 직후 제물포 중심의 작은 항구도시였던 인천이 거대한 항만도시가 되면서 중공업단지, 농업단지를 배후에 두는 산업도시로 변모한 것이다. 당시 일본인들은 '우리 진센'을 외쳤다. 인천부의 한국인들은 주변인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광복 후 미 군정 때 잠시 제물포시로 바뀌었던 인천부는 1949년 지방자치법 실시에 따라 경기도 인천시로 정립됐다(1949년 8월 15일). 시의회가 구성되고 시장은 간선으로 선출됐다. 일제 잔재와 미 군정의 과도기적 조치들이 하나씩 청산돼 갔다. 경제 안정과 발전을 위한 여러 가지 시책도 잇따랐다. 그러나 6·25전쟁은 인천에 다시 한번 시련을 안겨주었다. 인명 피해나 이념 갈등도 컸지만, 일제가 남겨놓고 간 공장과 시설로 가까스로 일구던 경제가 사실상 무너지고 만 것이다. 더욱이 인천 상륙작전을 전후한 엄청난 포격에다 휴전 후 20만 명의 이북 피란민까지 떠안아야 돼 지역사회는 설상가상의 고초를 겪어야 했다.

60∼70년대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수출 드라이브 정책을 통해 인천은 재도약했다. 임해공단들과 부평공단(경인공단)에 대한 집중 투자, 사회간접자본시설 확충, 편의시설 확대가 추진됐다. 인천 내항의 도크 확장(1966∼75), 연안부두 축조(1973), 경인고속도로 건설(1967∼68), 경인전철 부설(1971∼74) 등이 그런 산물이다.

그 덕에 인천과 주변 지역에선 각종 산업이 발달하고 인구가 빠르게 늘어났다. 인천시는 구제(區制)를 실시하던 68년 서울·부산·대구에 이어 4대 도시로 성장했다. 81년 인구 100만 명을 돌파한 뒤에는 인천직할시로 승격했다. 인천은 세계화와 중국의 고도성장에 힘입어 농공업도시 부평을 아우르고, 농수산과 문화관광의 보고(寶庫) 강화·옹진, 인천국제공항을 더해 미래의 한반도 허브로 뻗어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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