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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정확하게' 일하는 이탈리아 정신 배웠으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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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1999년 초 필자는 유엔공업발전기구(UNIDO) 산하 국제과학기술원(ICS)에 근무하기 위해 이탈리아 베네치아 인근 지역인 트리에스테에 처음 발을 디뎠다. 도착한 다음날 아침 첫 출근을 하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는데, 유치원에 가는 어린아이들에게 배웅 나온 엄마들이 "피아노, 피아노"라고 자주 말하는 걸 보았다. 순간 "아! 여기가 바로 위대한 음악과 예술의 나라 이탈리아구나! 대부분의 엄마가 애들에게 아침부터 피아노를 열심히 공부하라고 격려하는가 보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날 저녁 큰 가방을 들고 택시를 타려는데, 영어를 전혀 하지 못하는 운전기사가 나에게 "피아노, 피아노" 하는 것이었다. 설마 운전기사가 나에게 피아노를 열심히 치라고 하는 것은 아니겠고, 그럼 무슨 뜻인가? 이탈리아에서 피아노는 우리가 말하는 피아노가 아닌가 보다 생각했고 다음날 출근해 동료에게 물어보니 이탈리아어로 피아노(piano)는 '천천히' 라는 뜻과 1층, 2층 할 때의 '층'이라는 뜻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가 말하는 피아노는 이탈리아어로 피아노포르테(pinaoforte)라고 한다고 했다.

이후 이탈리아에서 생활하는 동안 피아노는 자주 듣는 단어 중 하나가 됐다. '빨리, 빨리'라는 단어를 자주 듣던 사회에서 '천천히, 천천히'를 자주 하는 사회에 적응하기는 쉽지 않았다. 수퍼마켓들은 보통 일주일에 이틀씩이나 문을 닫고, 은행은 오후 3시쯤 문을 닫는데 줄 서서 30분 이상 기다리는 것이 예사로 그곳 사회는 우리 사회보다 분명 느린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탈리아 사람이 이렇게 느리고 여유 있게 살면서 어떻게 서방 선진 7개국(G7) 중 하나며, 세계에 자랑하는 찬란한 문화유적과 예술을 창조할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됐고, 그 저력은 바로 '천천히, 천천히' 정신이라고 필자는 결론을 내렸다.

이탈리아의 문화유적들은 대부분 일년 내내 부분 부분 조금씩 보수관리를 한다.

항상 천천히, 꾸준히, 그리고 꼼꼼하게 문화재를 관리하는 것이다. 베네치아에 있는 몇백년 된 건물 거의 대부분에 아직도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그것이 가능한 것도 바로 천천히, 꼼꼼히 건물들을 지었고, 그 이후 천천히, 꾸준히, 그리고 꼼꼼하게 보수관리해 왔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탈리아가 자랑하는 섬유.의류.가구.정밀공학 제품 등은 가족기업 단위 산업을 중심으로 고도로 숙련된 기술자들에 의해 계승.발전돼 왔는데, 이도 대대손손 천천히, 꾸준히, 그리고 꼼꼼히 한길을 걸어 왔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한국에 다시 돌아와 보니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 동안 못 보던 아파트가 들어서 있고 길이 새로 나 있는 등 다시 한번 급변하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이탈리아와 비교할 수 있었다.

해방에 연이은 한국전쟁을 겪은 후 가난의 짐을 벗기 위해 한국민들은 앞만 보고 '빨리빨리'를 외치며 달려 왔다. 그 피나는 노력의 결과 이제 가난을 벗고 선진국 문턱에 와 있다. 그러나 선진국으로 가는 길목에서 '빨리빨리' 정신의 부작용 또한 여기저기서 발견되고 있다. 일을 하는 데 최상의 미덕은 '빨리빨리' '정확하게' 하는 것일 게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어떤 일을 빨리빨리하면서 꼼꼼히 하기란 무척 힘들다. 오히려 빨리빨리하다 보면 대충대충 하게 마련이다.

어떤 일을 할 때 '빨리빨리' '대충대충' 해서 문제가 생기기보다 차라리 '천천히' '정확하게' 해서 문제가 없는 게 경제적으로 이익이며, 결론적으로 더 효율적으로 일을 한 결과가 되는 것이다. 토끼를 이긴 거북이의 이야기와 같은 이치다.

앞으로 한국 사회에도 100년 넘게 사용되는 건물들, 몇대에 걸쳐 장사하는 가게들, 100년 넘는 기업들이 나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우리 아이들에게 천천히 정확하게 하도록 가르치는 것부터 생활화해야 한다. 현재의 경제불황을 극복하고 선진국을 실현하는 길은 우리 자신을 천천히 둘러보고, 정확한 방향을 잡아 꾸준히 나가는 데 있다고 보며, 필자는 그것을 피아노 정신이라 부르고 싶다.

장창배 한국 GE 영업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