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노벨상을 받은 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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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국민의 여론을 최고로 두려워하는…. "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연두기자회견에서 '강한 정부' 를 설명하면서 이런 수식을 했다.

金대통령은 여론에 민감한 편이다.

여론 이상의 무기를 갖지 못한 야당 정치인으로 성장해왔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金대통령은 "국민을 하늘같이 받들고…" 라는 말을 자주 해왔다.

'최고로' 라는 표현도 金대통령이 흔히 쓰는 어법이다.

그러나 여론을 '두려워' 한다니….

야당 시절부터 金대통령을 가까이서 모신 한 청와대 비서관은 이 대목을 이렇게 설명했다.

"노벨평화상 수상 이후 변화가 생겼습니다. 자신감이 생긴 것이지요. 과거 언론에 보도되면 곧바로 반응하셨지만 이제 소신을 갖고 일을 하시겠다는 겁니다. 결과로 말하겠다는 것이지요. "

그는 金대통령이 지난 연말부터 "인기에 연연하지 않겠다" 고 말해온 것을 상기시켰다.

"역사에 남는 대통령이 되겠다" 는 말에도 밑줄을 그었다.

노벨평화상을 받은 뒤 金대통령의 달라진 모습은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인권법과 국가보안법 개정, 사형제도 존속 여부, 지구온난화 등 환경문제에 대한 관심, 21세기 새로운 국제 이슈로서 정보화 격차에 대한 대안….

과거 유럽의 신문에서나 찾아볼 수 있던 국제적 이슈들을 국내정치에 끌어들이고 있다.

국제회의에서는 이런 이슈들을 내놓고 주변국 지도자들에게 훈수를 두기도 한다.

대북정책도 북한이 변할 것이라는 믿음을 담보로 하고 있다. 금강산 관광을 통해 달러를 주고, 비료.식량.전기도 준다. 늑장 제설(除雪)이나 항공기 회항, 금연문제 등에 일일이 개입하는 도덕선생님 같은 모습도 보인다.

金대통령의 발언은 솔직히 '여론' 보다 '소신' 에 무게가 실린 것이라고 그 비서관은 시인했다. 국제적으로 인정 받았다는 자신감으로 국정을 자기 색깔을 내며 끌고 가겠다는 의지가 보인다고 한다.

그 예로 지난달 29일 한완상(韓完相)교육부총리와 한명숙(韓明淑)여성부 장관을 임명한 것을 들었다. 새로 기용한 두 사람이 모두 대표적 진보인사다. 우리 사회의 뿌리깊은 보수세력의 반발을 예견하면서도 자신의 색깔을 내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金대통령이 생각하는 것은 '철의 여인' 으로 불린 마거릿 대처 전 영국총리라고 한다. 여론의 반발을 일축하고 과감한 구조조정을 단행해 영국을 IMF(외환)위기에서 구했다는 것이다. "여론은 변화무쌍해 결과가 좋으면 언제든 바뀔 수 있다는 생각" 이라고 한다.

지도자가 권력을 누리지 않고 개혁에 앞장 설 경우 나라는 큰 기회를 얻게 된다. 비록 소련의 해체로 이어졌지만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개혁)는 러시아에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그렇지만 그러한 소신이 정치적 이해와 얽히면 독단이 된다. 노벨평화상으로 다져진 도덕적 우월감이 여론을 향한 귀를 막으면 위험하기까지 하다.

金대통령이 의원 꿔주기는 '야당의 비협조에 따른 불가피한 선택' 이라고 항변한 데서 그런 불안을 느낀다.

경제위기를 심리요인에서 찾고, 언론이 위기를 조장한다고 불만을 토로한 金대통령이 언론개혁을 요구한 뒤 중앙언론사에 대한 일제 세무조사가 시작된 것도 그렇다.

그럴 때마다 "노벨상을 받은 분답게…" 라는 김수환(金壽煥)추기경의 발언을 곱씹게 된다.

김진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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