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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 레저] '억새'하면 천관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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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득량만 너머 고흥반도 위로 해가 솟는다. 빛 받은 억새들이 황금색으로 일렁이기 시작한다. 득량만 바다가 넘실대며 역류하는 것 같다. 천관산의 가을 아침은 황금 일색의 엘도라도다. 권혁재 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억새를 보는 요령이 있다. 해뜰녘 또는 해질녘이 좋다. 해를 마주보고서야 더욱 좋다. 바람이 불어야 몸짓을 시작하듯, 햇살이 비춰야 억새는 빛을 낸다. 해지기 전에 오르라고 권한다. 늦어도 오후 서너시엔 억새밭 안에 들어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두세 시간쯤 뒤 서쪽을 향하라. 햇살이 엷어지면서 은세계가 황금 세상으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눈부시게 하얗던 세상은 흔적도 없어지고 황금빛만 너울너울 출렁인다. 산악인들은 "단풍이 좋으면 억새가 나쁘고, 억새가 좋으면 단풍이 나쁘다"고 말한다. 올해 설악의 단풍은 예년만큼 진하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이 가을 억새는 유독 눈부시다. 억새는 단풍과 달리 11월 말까지 이어진다. 그래서 가을은 억새다. 아니 억새가 가을이다. 억새 명소 여섯 곳을 추렸다.

장흥.제주=최현철 기자<chdck@joongang.co.kr>
정선=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 빛의 자식들

억새는 우수의 빛을 띠고 있다. 스산한 바람에 공명하는 사각거림이 쓸쓸하고, 회백의 색감이 힘없으며, 끊임없이 고개를 숙이는 모양새가 처량하다. 같은 철에 만개하는 단풍이 화사한 새 색시 얼굴이라면, 억새는 영락없이 트렌치 코트를 입고 고개 숙인 남자의 뒷모습 같다. 그러나 눈부신 햇살을 향해 돌아서면 완전히 다른 풍경이 된다. 거울처럼 빛을 퉁겨내며 영롱하게 반짝이는 은빛 물결. 한 사물의 앞과 뒤가 이처럼 다른 게 또 있을까? 빛이 사라지면 죽고, 빛을 받으면 타오르는 억새는 빛의 자식들이다. 벼과에 속하는 다년생 식물인 억새는 유달리 햇빛을 좋아한다. 허허벌판 황량한 곳에서도 뿌리를 내려 가을이면 흔하게 눈에 띄지만 주위에 나무가 자라 빛을 가리기 시작하면 급속하게 사라진다. 억새가 산을 온통 점령하고 도도하게 물결치는 곳을 쉽게 찾기 어려운 이유다. 높지 않은 산(723m)이지만 봉우리 세개를 잇는 능선을 따라 40만평이 온통 억새로 뒤덮이는 전남 장흥의 천관산은 그래서 가을엔 독보적이다.

*** 전화위복

"천관산이 처음부터 억새 낙원은 아니었어요."

지난 15일 천관산 산행에 동행한 장흥군청 환경산림과 문재춘 팀장은 다도해를 배경으로 한껏 햇살을 머금고 일렁이는 억새밭 한가운데서 지난 역사 한자락을 들춰냈다. 지금 억새가 차지하고 있는 자리엔 해송이 늠름하게 지키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985년 어느날 큰 재앙이 찾아왔다. 등산객의 버너가 뒤집히면서 큰 불이 난 것이다. 꼬박 하루를 간 산불은 땅 밑 2㎝까지 태웠다. 10㎝만 파도 돌이 나오는 바위산은 더 이상 생명을 키울 힘을 잃은 듯했다. 그런데 이듬해 흉칙한 폐허 위로 억새가 올라왔다. 화마가 훑고간 흔적을 억새가 고스란히 메우며 새로운 명소가 탄생했다.

"전화위복이네요." 맞장구를 예상하며 던진 질문에 문 팀장은 한동안 반응이 없었다. 그가 당시 천관산 담당 공무원이었던 것이다. "남들은 그만한 구경 없다고 했지만 우린 발만 동동 굴렀죠. 요즘도 취사도구 들고 산에 오르는 등산객을 보면 그때 생각이 나서 가슴이 철렁합니다."

고비는 한 번 더 있었다. 몇 년 뒤 억새 사이로 신갈나무와 싸리, 청매래넝쿨이 올라오면서 좋았던 억새가 시들해졌다. 다시 불을 지르자는 제안도 나왔지만 문 팀장은 펄쩍 뛰면서 인력을 동원해 일일이 다른 종을 솎아냈다. "이젠 자리를 어느 정도 잡았다"며 억새밭을 둘러보는 그의 눈빛에선 잘 자란 자식을 보는 부모의 뿌듯함이 묻어났다.

*** 자연돌과 인공돌

천관산 등산로는 10개나 된다. 이중 장흥읍에서 가까운 관산 쪽에서 오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600년 묵은 거대한 태고송이 인상적인 장춘재를 거쳐 이러저러한 이름이 붙은 기암괴석을 감상하며 1시간40분 정도 오르면 희끗희끗 억새가 눈에 들어온다. 내쳐 5분 정도 더 오르면 시야가 트이며 산을 온통 채우고 있는 너른 억새밭을 만나고 그 너머로 점점이 섬을 품은 득량만이 펼쳐진다.

구룡봉과 닭봉.연대봉을 잇는 1㎞ 남짓한 능선이 모두 억새밭이다. 억새를 제대로 감상하려면 빛을 안고 걸어야 한다. 시간대별로 등산로를 잘 선택해야 하는 이유다. 오전엔 서쪽 구룡봉에서 연대봉 쪽으로, 오후엔 연대봉 쪽에서 출발해 반대로 오는 코스가 압권이다.

차를 갖고 가는 일정이 아니라면 반대편 탑산사 쪽으로 내려오는 것이 좋다. 다도해를 눈에 담으며 내려오는 재미도 쏠쏠하지만 산 밑에서 600여개의 돌탑과 54명의 문인들의 시비로 빽빽한 문학공원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돌이 흔한 바위산인데도 사람의 정성이 물씬 묻어나는 돌탑과 돌비석은 또다른 감흥이다. 탑산사에서 조금 더 나가면 정남진이 나온다. 서울서 남쪽으로 직선을 그어 바다와 만나는 지점이다. 비록 바로 앞에 만들어진 간척용 둑으로 운치는 반감됐지만 이곳 사람들은 강릉 정동진과 같은 영화를 꿈꾸고 있다.

*** 여행정보

서해안고속도로 목포나들목에서 나와 강진을 지나면 장흥에 닿는다. 장흥읍에서 23번 국도를 타고 가다 관산읍 지나 삼거리에서 우회전하면 장천재 주차장. 버스를 이용한다면 광주터미널에서 장흥 경유 회진행 직행버스(40분 간격)를 타고 관산에서 내린다. 장천재 주차장까지 택시 기본요금 거리. 탑산사로 내려왔다면 대덕읍까지 나와 같은 버스를 타면 된다. 하루 묵어간다면 장흥읍에 관광호텔(061-864-7777.3만원)을 비롯해 모텔이 많다. 안양면 바다하우스(061-862-1021)의 바지락회(4인 기준 3만4000원)는 놓치면 아까운 별미. 이청준.송기숙.한승원 등 장흥 출신 작가들이 제가끔 작품에 풀어놓은 배경을 일람해 보는 것도 흥미로운 여행이다.

*** 포천 명성산

수도권의 대표적인 억새 명소. 바위산 아래 광활한 억새 군락지가 형성돼 있다. 한시간 산행이라지만 산길은 가파른 편이다. 억새밭은 정상인 삼각봉 바로 아래까지 올라야 나온다. 잡풀도 많아 다소 지저분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산정호수를 품은 산세가 워낙 그윽하다. 명성산 억새가 유명한 이유는 수도권 당일 여정 산행으로 안성맞춤이기 때문이다. 포천 일동 갈비를 먹어도 좋고, 산정호수에서 온천욕을 즐길 수도 있다. 신라의 마지막 왕자인 마의태자가 통곡했다고도 하고, 왕건에게 쫓긴 궁예가 숨어 들어와 울었다고도 한다. 그래서 명성산(鳴聲山)이다. 산정호수까지 가면 명성산 입구다. 포천 시내에서 30분 거리. 해발 922m. 산정호수 매표소 031-531-6103, 어른 입장료 1000원.

*** 창녕 화왕산

경남 창녕 화왕산은 봄.가을이 완연히 다르다. 봄엔 진달래로 붉게 물들다 가을엔 은빛 억새가 물결친다. 해발 756m인 정상 부근의 5만여평이 억새 군락지다. 이른바 십리 억새밭이라 불리는 명소. 봄에 화왕산을 올라봤다고 해서 가을에도 똑같은 코스를 밟아선 안 된다. 진달래와 억새 군락지는 다르다. 억새 산행이라면 창녕여중을 지나 자하곡 매표소에서 시작하는 왕복 네 시간 코스를 추천한다. 일부 산악인은 화왕산과 인근 영남알프스의 사자평 등 영남권의 억새 명소엔 잡풀이 많다고 한다. 하지만 산행이 그리 어렵지 않고, 억새 군락지가 워낙 커 가을 산행으로는 제격이다. 대규모 온천 지대인 부곡 하와이도 인근이다. 구마고속도로 창녕 나들목으로 빠져나와 창녕 시내를 거친다. 자하곡 매표소 055-530-2497. 어른 입장료 1000원.

*** 정선 미둥산

십수년 전만 해도 아는 이가 드물었다. 수풀 우거진 산과 계곡을 좋아하는 우리네 정서상 산머리에 나무가 없어 민둥산(上)이라 불리는 이 산은 별 매력을 끌지 못했다. 해서 주민들은 산기슭을 일궈 배추를 심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나무가 없는 능선 모두가 억새로 가득 찼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민둥산은 한국을 대표하는 가을 풍경 중 하나가 됐다. 주말마다 전국에서 관광버스가 쉼없이 몰려든다. 민둥산 억새가 유명한 이유는 잡풀이 드문 데다 한길을 넘을 만큼 억새가 크기 때문. 산행 코스도 여럿이다. 40분 만에 정상에 이를 수도 있고, 인근 소금강에서 시작하는 다섯시간 코스도 있다. 해발 800m의 발구덕마을까지 차가 들어가지만 주말엔 통제한다. 산행 기점은 증산마을. 정선에서 태백 방향 429번 지방도로를 타다보면 왼쪽에 민둥산 입구가 보인다. 입장료 없음. 해발 1117m.

*** 서울 하늘공원

서울의 억새 명소. 상암동 하늘공원을 오를 때마다 상전벽해란 말이 생각난다. 불과 5년 전, 이곳은 쓰레기 산 난지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서울을 대표하는 생태환경 공원이다. 정상께 조성된 억새 군락지를 따라 산책로가 잘 나 있다. 대규모 억새 군락지는 없다. 대신 남녀노소 누구나 손쉽게 억새를 감상할 수 있게끔 주변 시설을 잘 갖췄다. 인터넷 홈페이지(http://parks.seoul.go.kr/worldcup)나 전화(02-300-5605)로 생태체험 프로그램 신청도 가능하다. 월드컵 공원 전시관에서 무료 셔틀버스가 운행한다. 오전 9시부터 20분 간격. 걸어서는 20분쯤 걸린다. 조명이 들어오는 저녁에 더 그윽하다. 이외에 여의도 생태공원, 한강 이촌지구나 광나루지구 등 한강변도 억새밭이 좋다.

▶ 제주도는 햇살이 좋으면 섬 전체가 빛난다. 잠시 빛을 담았다 화려하게 뿜어내는 억새 때문이다. 끊임없이 흔들리면서도 화려함을 잃지 않는 억새의 물결을 보고 있자면 풍덩 빠지고 싶은 유혹을 견딜 수 없다. 김성룡 기자 <xdragon@joongang.co.kr>

*** 제주

섬 전체가 억새로 흐드러진다. 불쑥불쑥 솟은 오름 자락이든, 한라산을 가로지르는 도로변이든, 밭과 무덤을 둘러싼 얕은 돌담가든 어디서나 가을의 절정을 맛보게 된다. 물론 햇살이 좋다면 말이다. 그중에서도 압권은 산굼부리. 희귀한 마르(MARR)형 화산 지형이어서 천연기념물로 지정됐지만 가을엔 분화구 옆 드넓은 억새밭이 더 장관이다. 억새 사이로 군데군데 오솔길을 내 산책하기 그만이다. 다만 관광객이 몰리기 때문에 고즈넉한 분위기를 바라긴 어렵다. 교래리 삼다수 생수공장 옆과 성읍민속마을 부근 ATV 체험장 뒤편에도 수만평의 억새평전이 펼쳐져 있다. 북제주 조천읍과 남제주 남원읍을 잇는 1118번 남조로와 관음사로 가는 1117번 제1 산록도로는 길가에 도열한 억새 무리가 드라이브 기분을 한껏 북돋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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