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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가 있는 이야기 마을] 사각 팬티였나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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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면

2001년 중국 상하이(上海)였다.

회사 사람들과 함께 관광을 겸한 출장을 갔다. 저녁 상하이에 도착해 호텔에 짐을 풀었다. 일단 저녁을 먹으러 나섰다. 산해진미에 고량주도 곁들였다. 알딸딸해질 때쯤 일어섰다. 일부는 시내 구경을 더 하겠다고 나섰고, 나를 비롯한 몇명은 서울과 한시간의 시차 때문인지 피곤함을 느끼며 먼저 호텔로 들어갔다.

샤워를 하고 러닝 셔츠.팬티 바람으로 침대에 들어갔다. 까칠한 침대보의 감촉이 그만이었다. 막 잠이 들려는데 옆방에서 엄청난 소음이 들렸다. TV를 크게 틀어놓은 데다가 고래고래 노래까지 부르는 것이었다. 베개로 귀를 막아도 소용 없었다. 아, 호텔도 방음은 모텔과 별 차이 없구나.

참다 참다 화가 났다. 러닝 셔츠. 팬티 바람으로 뛰어나가 옆방 문을 쾅쾅 두드린 뒤 외쳤다. "비 콰이어트!(Be Quiet)."

의기양양하게 돌아서서 내 방으로 왔다. 문 손잡이를 돌렸다. 그런데 이게 웬 일. 문이 안 열렸다. 그렇다. 국내 출장 때 모텔만 전전하던 나는, 호텔방 문은 닫히면 저절로 잠긴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었다.

당황…불안…초조. 미친 듯이 문을 흔들었지만 별 무소용이었다. 이를 어쩌나. 일단 문에 바짝 몸을 붙였다. 그러면 눈에 띄지는 않으리란 생각에서였다. 그런 채로 고개만 살짝 내밀어 혹시 종업원이 지나가지 않는지 살폈다. 문 좀 열어달랠 작정이었는데, 야속한 하늘이여. 아무도 지나가지 않았다. 시간도 안 흘렀다. 시계를 보니 단 2분이 지났는데, 그게 그리 길 수가 없었다.

성질 급한 경상도 사나이로서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엘리베이터로 달려가 버튼을 누르고 얼른 몸을 옆으로 피했다. 문이 열린 순간 다시 고개만 살짝 들이밀고 살폈다. 아무도 없었다.

종업원을 부르려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로비로 내려갔다. 내가 묵은 곳은 5층. 마치 로켓 발사 카운트 다운이라도 하듯, 엘리베이터의 층 표시 숫자가 5에서 하나하나 내려갔다.

이번에도 문 옆으로 몸을 딱 붙였다. 드디어 1층. 문이 열리자마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와르르 들이닥쳤다. 이럴 수가…. 고개만 내밀고서 종업원을 살짝 부르려던 내 계획은 와르르 무너졌다. 그래도 나라 망신은 안 될 일. 순간적으로 꾀를 내 얼굴을 가리고 일본말로 '스미마셍(죄송합니다)'이라고 하려는데,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어, 이거 진훈씨 아냐. 그런데 이게 무슨 꼴이야."

마침 시내 구경 나갔던 동료들이 돌아와 엘리베이터에 탄 것이었다. 신이시여, 감사하나이다.

그렇게 그날을 넘기고 첫 해외 출장을 무사히 마친 뒤 돌아왔다. 귀국 보고 회식 자리. 남들이 "글쎄 쟤가 그랬대요" 하기 전에 스스로 자백하자는 심정으로 그 얘기를 꺼냈다. 모두들 웃는데 후배 여사원 하나는 웃지 않았다. 그러더니 정색을 하고 이렇게 묻는 것 아닌가.

"그때 팬티가 삼각이었어요. 사각이었어요?"

김진훈(34.회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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