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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금융, 이정도는 돼야] 8. 깐깐한 신용평가 회사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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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우리는 전지전능하지 않습니다. 1백년 가깝게 신용평가를 해오며 차근차근 시장의 신뢰를 쌓았을 뿐입니다."

지난해 12월 14일 뉴욕 맨해튼 월가의 북쪽 끝자락인 처치 스트리트 99번지. 간판 하나 달려있지 않은 평범한 10층짜리 연갈색 건물이 세계 자본시장의 문지기인 무디스 본사였다.

1층 안내 데스크에서 취재진을 맞은 크리스티나 디팔로 홍보부장은 무디스의 위상과 역할을 이렇게 설명했다.

"무디스의 신용등급 평가는 은행이나 기업이 국제 자본시장으로 나가는 데 필요한 '여권' 입니다. 80조달러로 추정되는 자본시장 가운데 30조달러어치의 채권에 대한 신용평가를 우리가 맡고 있습니다."

1997년 이후 아시아 각국이 뼈저리게 경험한대로 무디스(Moodys)와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S&P), 피치(Fitch)등 세계 3대 신용평가사의 위세는 대단하다.

지난해 12월 초 무디스는 세계적인 복사기 업체인 제록스의 회사채를 투기등급으로 격하시켰다. 발표 뒤 제록스 주가는 하루 만에 20% 폭락했고 기업어음(CP)과 단기 차용증서를 통한 자금조달이 불가능해져 은행에 추가 대출을 요청해야 했다.

무디스의 효시는 출판업자인 존 무디가 1909년 노선 신설이 한창이던 철도회사의 경영 및 재정상태를 상세히 분석해 채권의 상환능력을 등급화하면서부터다. 당시 미국은 유럽과 달리 은행의 경영기반이 취약해 리스크가 높은 장기자금을 투자할 여력이 없었다.

철도회사들이 궁여지책으로 높은 금리의 회사채를 발행했지만 투자자들은 회사채 사기를 망설였다. 이 때문에 멀쩡한 회사까지 망하는 악순환이 빚어졌다.

이같은 상황을 풀어준 것이 기업 정보에 대한 조사를 바탕으로 리스크와 상환능력을 알려주는 신용평가사였다.

"신용평가는 복잡한 공식이나 컴퓨터 모델링으로 나오는 게 아닙니다. 이를 수행하는 수준 높은 애널리스트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5층 회의실에서 만난 아시아 금융기관 담당 니컬러스 크라스노 부장의 말이다. 재무제표 등 숫자로 표현된 자료는 신용평가의 출발점일 뿐이라는 것이다.

실제 신용평가사들의 평가지표에는 ▶수익성▶현금흐름▶금리부담 능력뿐만 아니라 경영진.현장 담당자와의 인터뷰, 신용평가에 대한 해당국가와 기관의 자세 등도 포함된다. '종업원의 사기까지 측정한다' 라는 말이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런던 금융 중심가인 '시티' 한가운데 웅장한 자태로 서있는 잉글랜드은행(영국 중앙은행)에서 북쪽으로 10여분 걸어가면 무디스의 아성에 도전하는 피치의 런던 본사를 찾을 수 있다.

이 회사는 97년 영국의 IBCA가 뉴욕에 거점을 둔 피치사와 합병하면서 피치IBCA가 됐고, 지난해 6월 미국 시카고에 기반을 둔 더프앤드펠프스(DCR)를 인수하면서 회사 이름을 '피치' 로 다시 바꿨다.

런던과 뉴욕 양쪽에 본사를 두고 있지만 소유주는 프랑스의 피말락이란 회사다.

지난해 12월 8일 런던 엘든스트리트의 본사 2층 회의실에서 취재팀을 맞은 캐럴 파이퍼 도일 이사는 신용평가 사업의 특성을 이렇게 설명했다.

"신용평가사에게는 객관성과 신뢰성이 생명과 다름 없습니다. 특정 평가대상자에 우호적인 평가를 내린다면 이것은 단번에 시장에 노출되고 이런 소문이 돌면 신용평가사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됩니다. 이따금 평가대상업체들로부터 유혹도 있고 항의도 받지만 우리가 신경 쓰는 것은 오로지 시장(market)과 평판(reputation)입니다."

회사 운명을 좌우할 수 있기 때문에 등급 결정은 매우 신중하게 이뤄진다. 기업의 등급 조정 때는 5~6명으로 구성된 평가위원회가 열려 투표로 등급을 결정한다.

국가 신용등급 같은 중대 사안은 국가 담당 애널리스트 2명과 고위 경영진 2명이 참가한 '12인 위원회' 에서 정한다. 등급 조정 직전에는 대상기업이나 국가를 반드시 방문하도록 돼 있다.

도일 이사는 "신중하게 결정한 등급인 만큼 쉽게 바꾸지도 않는다" 고 말했다.

"아주 강력한 항의가 들어오면 조정과정을 거치기도 합니다. 하지만 등급이 바로 바뀌려면 해당회사가 반드시 우리가 몰랐던 정보를 제시해야 합니다. 만일 회사측이 뒤늦게 새 정보를 제공한다면 스스로가 투명하지 못하다는 것을 자인하는 것이 됩니다. 이런 일이 있다면 업체측으로서도 득이 될 것이 없지요. "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세계 자본시장의 문지기로서의 자신감을 엿보게 했다.

뉴욕.런던〓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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