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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저 어울림의 무늬, 옛 판화서 미래 디자인을 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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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21면

얼음이 갈라진 틈으로 매화가 피어나고 대나무가 자란다. 겨울이 가고 봄이 왔음을 상징하는 빙열매죽문판. 지금 봐도 감각적인 패턴이다.

판화는 판을 이용해 찍어낸 그림이다. 그림(회화)인 동시에 인쇄물(산업)이다. 오늘날과 같은 인쇄기술이 없던 시절, 판화는 가장 인기 있는 예술이자 대중오락이었고, 수복강녕을 기원하는 부적이기도 했다. 17일 강원도 치악산 자락 명주사에 있는 ‘고(古)판화박물관’에 판화를 보러 갔다. 옛 판화에서 아이디어를 ‘훔쳐’ 오늘의 디자인으로 되살리고자 하는 이들과 함께. 현직 미대 교수부터 캐릭터 벤처 대표까지 ‘디자인 좀 안다’는 전문가 37명이다. 이날 나들이는 한국공예문화진흥원이 마련한 ‘박물관과 공예의 만남-판화의 재해석’ 행사로 이루어졌다. 현대로 튀어나오려 하는 고판화의 세계를 들여다본다.

글=이진주 기자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목판 2000점, 판화 800점이 살아 숨쉰다

치악산은 거대한 눈밭이었다. 절은 버스가 채 닿지 못하는 곳에 있었다. 천지사방에 펼쳐진 프레임 없는 풍경화 속을 걸어 태고종 계열 사찰인 명주사에 닿았다. 자칭 ‘머리 허연 스님’인 한선학 박물관장이 일행을 맞았다. 이 절은 1998년 세워졌다. 소나무로 뼈대를 세우고 황토로 살을 바른 뒤 너와지붕을 얹은 특이한 절이다. 2004년에는 아시아 각지에서 모은 목판 2000점과 서책 700점, 판화 800점을 전시할 수 있는 사설 박물관을 지었다. 거기엔 원래 용도를 잃고 쪼개져 일본식 4각 화로(‘이로리’) 장식으로 오용됐던 오륜행실도 목판도 포함돼 있다. 판화로 찍어낸 호랑이는 금세 밖으로 뛰어나올 기세였고, 얼음을 깨고 막 꽃망울을 터뜨리는 매화는 향기를 퍼뜨리는 듯했다. 바깥의 풍경을 압도하는 판화 여행이 이제 시작된다.

1 사격자백물문판. 광무제 때 쓰던 태극문양이 보인다. 2 구갑국화문판. 거북 등껍질과 국화문양이 들어갔다. 3 설화운용문판. 눈꽃문양을 배경으로 원 안에 용과 구름이 있다. 4 사격자능화문판. 능화(마름모꼴의 네 잎 꽃)가 사방으로 이어진다.


책 표지서 떡살까지 일상을 살찌웠던 고판화

판화는 예로부터 예술과 지식을 대량 복제해 백성들의 감성과 지성을 키운 매체다. 한 관장은 실례를 통해 판화가 우리 민속사에 끼친 영향을 설명했다.

새해가 되면, 임금은 아끼는 신하들에게 도화서에서 그린 그림을 하사했다고 한다. 신하들은 그림을 받잡고 복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대문에 붙여두었다. 그것이 ‘세화(歲畵)’다. 그 그림을 가질 수 없었던 백성들은 이를 흉내 낸 판화를 만들어 대량 복제해 걸었다.

호랑이와 까치가 그려진 민화가 인기를 모으자 민화를 똑같이 재현한 판화도 함께 유행했다. 당연히 원화보다 값이 쌌다. 삼국지·수호지 등 인기 있는 소설에도, 용비어천가·삼강행실도 같은 유교 서적에도, 불경의 내용을 압축한 변상도에도 판화로 찍어낸 삽화가 들어갔다. 벽지와 포장지, 양반들의 시화지, 옷을 재단하고 흉배를 수놓는 본, 책 표지, 떡살 등 장식이 필요한 모든 곳에 판화가 있었다. 동일한 패턴을 반복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무늬를 만들어낸 지혜도 발휘됐다. 이렇게 우리네 조상들의 일상 속에서 숨쉬던 판화가 박물관에서 객들을 맞고 있었다.

섬유·금속·가구 디자인의 아이디어 저수지

우리 고판화의 그림들은 실제보다 단순화·기호화돼 있다. 디자이너들이 고판화에 눈을 반짝이는 이유도 바로 여기 있다.

한선학 고판화박물관장이 손잡이가 달려 같은 패턴을 길게 찍어낼 수 있는 사격자능화원형문판을 찍어내고 있다.

한 관장은 “우리 판화는 사물의 특징과 원근을 선으로 표현해 디자인적으로 우수하다”고 말했다. 참석자들은 섬유·목각·금속·도자·유리 등 저마다의 분야에서 고판화를 되살릴 수 있겠다고 입을 모았다. 이명주 홍익대 금속조형디자인학과 교수는 “평면으로 구성된 고판화의 모티프를 입체화해 생활가구로 쓸 수 있다”고 제안했다. 정영관 동덕여대 디지털공예과 교수는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을 공공미술 소재로 사용하는 것처럼 건물 외벽이나 LED 작품으로 응용하면 좋겠다”는 의견을 냈다. 문화컨설턴트인 장은겸 뮤제아시아 대표는 “고판화에서 가장 매혹적인 요소는 그것을 즐겼던 백성들의 마음”이라며 “그런 스토리텔링을 차용하자”고 말해 박수갈채를 받았다.

어차피 문화라는 것은 생명 현상과도 같다.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건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의 속성이다. 당연히 고판화라는 옛 문화도 살아남으려고 몸부림친다. 오늘날 한 특급호텔 벽에 고판화를 찍어낸 판이 걸려 있는 건 ‘시장’에서도 드디어 그 움직임을 눈치챘다는 뜻이다. 미술평론가 김진하는 고판화와 디자인의 만남을 주제로 한 글에서 “전통을 재연하고 재현하는 일뿐만 아니라 현대적으로 번안하고 응용하는 작업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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