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벅지 예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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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호 35면

삼국지에 ‘비육지탄(<9AC0>肉之歎)’이라는 고사성어가 나온다. 유비가 술을 마시다 자신의 넓적다리에 살이 붙은 걸 보고 탄식했다는 데서 유래한 말이다. 전쟁터를 누비던 시절에는 말 안장에서 살다시피 해 넓적다리에 살이 오를 겨를도 없었던 유비였다. 공을 이루지 못한 채 허송세월하는 사이 몸이 예전과 달라진 것을 깨닫고 탄식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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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에 이 고사성어를 처음 알았을 때 내심 움찔했던 기억이 난다. 유비의 심중과 거리가 있지만 문자 그대로 퉁퉁한 허벅지를 못마땅해하던 심경과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국어사전에서 허벅지는 넓적다리 중에서 윗부분을 가리키는 말이다. 몸매가 두루 불만스럽던 사춘기 여자아이에게는 허벅지나 넓적다리나 맘에 안 들기는 매한가지였다. 성인이 된 요즘도 가끔 허벅지 타령을 한다. 스키니진처럼 통이 좁은 바지가 유행하면서다. 새 바지를 사러 가서 허벅지에 맞추면 허리가 크고, 허리에 맞추면 허벅지가 괴로워한다. 같은 사이즈라도 재단이 좀 더 다양해지거나 아니면 스키니진의 유행이 사그라지기를 기다릴 따름이다.

옷만 아니라 인간의 육체도 유행을 탄다. 정확히 말하면 시대에 따라 이상적인 육체의 유형이 달라진다. 서양의 고전명화에 곧잘 등장하는 여성들의 나신을 보면 실감할 수 있다. 그림 속 미인들은 볼록한 아랫배에 상당히 토실토실한 체형이다. 요즘 젊은이들이 원하는 몸매와는 거리가 멀다. 아름다운 육체에 대한 기준은 사회에 따라서도 다르다. 태국·라오스 접경 지역에 사는 카렌족은 목이 길어야 미인이란다. 여성들은 어려서부터 목에 고리를 걸기 시작해 나이가 들수록 고리 숫자를 늘려 간다. 이방인의 눈에는 아름답기는커녕 건강에 해롭지 않을까 걱정이 앞서는 풍습이다.

지금은 남성들도 ‘육체미’의 강박관념에서 자유롭지 않다. 여자들이 하이힐을 신듯, 남자들은 키높이 깔창을 깐다. 무섭게 발달한 복근, 이른바 식스팩을 자랑하는 건 남자 아이돌의 흔한 무대 퍼포먼스이자 개인기가 된 지 오래다. 그러고도 착 달라붙는 바지까지 맵시 나게 소화하려니 쉬운 노릇은 아닐 터다.

최근 ‘금벅지’라는 신조어가 등장했다. 밴쿠버 겨울올림픽 종목 중 여자 스피드 스케이팅 500m에서 금메달을 딴 이상화 선수에게 네티즌들이 붙여준 말이다. 허벅지를 비롯해 전신에 다져진 근육은 이 선수가 출발선부터 결승선까지 질주할 수 있는 파워를 뒷받침했다. 그런 근육이 어찌 저절로 생겼으랴. 남자선수 못지않게 고된 훈련을 감당해왔음을 짐작하게 만든다.

스포츠 스타들의 놀라운 성취는 기록뿐 아니라 통념도 바꿔놓는다. 쇼트트랙에서 한국 선수들이 세계 정상의 기량을 자랑한 지는 오래됐다. 하지만 순발력과 지구력을 겸비해야 하는 스피드 스케이팅에서 메달을 따는 건 기성세대에게는 희망 사항이었다. 밴쿠버에서 연이어 날아온 낭보는 이런 통념을 보기 좋게 깨뜨렸다. 이상화 선수의 금벅지도 그래서 고맙고 값지다. 경기장의 인간 승리는 스포츠 문외한의 눈에도 스릴을 넘어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미의 개념에는 사회적 경험이 작용한다. 인간의 육체와 동작에 내재된 아름다움에 눈을 틔워주는 건 화가들만의 몫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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