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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바이러스와 반세기 (60)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7면

60. 출혈열 극성 中방문

전세계적으로 유행성출혈열이 가장 극성을 부리는 나라는 중국이다.

전국 규모의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관광명소로 알려진 시안(西安)시만 하더라도 해마다 2만여명이 발생할 정도니 규모를 짐작할 만하다.

1978년 필자가 유행성출혈열 바이러스를 발견한 직후 내게 연구비를 지원한 미육군전염병연구소는 당시 중국에서 유행성출혈열 바이러스 혈청을 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고 밝혔다.

해마다 수십만명씩 환자가 발생하는 중국으로선 유행성출혈열이 절박한 과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전쟁 직전 월남한데다 반공주의자인 나는 중국에 대한 반감으로 이를 거절했다.

하지만 무슨 까닭인 지 미국은 필자의 허락없이 80년 중국에 혈청을 넘겨주었다. 닉슨 미국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며 벌였던 핑퐁외교 때문으로 생각된다.

이 일로 중국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지녔던 필자는 우연히 중국을 방문하게 됐다.

82년 도쿄에서 세계보건기구 전문가회의가 열렸는데 이곳에서 중국인 학자를 만나 초청을 받은 것이다.

당시는 냉전시대였고 중국은 적성국가였으므로 정식절차를 밟아선 입국이 불가능했다. 세계보건기구 사무총장이었던 일본의 나카지마박사가 힘을 썼다. 그는 필자에게 한국 여권 대신 세계보건기구 외교관 여권을 발급했다.

이렇게 해서 86년10월 필자는 중국 베이징에 도착했다. 그들이 원했던 바이러스 혈청은 물론 진단용 키트도 가져갔다.

중국국립바이러스연구소가 초청자였다. 나는 이들에게 유행성출혈열의 연구 노하우를 전수했다.

어느날 갑자기 북한의 바이러스학자인 김낙제박사가 베이징(北京)에 필자가 머물고 있는 호텔로 찾아왔다.

그는 과거 두 차례 국제학회에서 만나 서로 안면이 있던 터였다. 그는 당지도원이라고 불리는 사람과 함께 왔다.

내용인즉 필자의 누이동생이 베이징에 와 있으니 한번 만나보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필자보다 6세 어린 누이동생은 월남하지 못하고 북에 머무르고 있던 터였다. 갑작스런 제의였지만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다음날 저녁 누이동생을 만났다. 어렸을 때 필자의 부친이 환갑때 찍은 사진을 증거물로 갖고 왔다.

헤어진 지 37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대번 누이인 줄 알아볼 수 있었다. 쪼글쪼글 늙어보이는 것이 안타까웠다.

누이는 제법 근사한 손목시계를 차고 왔는데 도청장치라도 있는 줄 알고 열어봤더니 고장난 시계가 아닌가.

나는 옆에 있던 아내의 손목시계를 풀어 누이에게 전달했다. 누이는 인민군 군관과 결혼해 살고 있는데 비교적 유복하게 살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몹시 불안에 떨고 있는 모습이었다. 정치적 이야길 일절 배제하고 덕담만을 나누었다.

헤어질 무렵 누이는 내게 북한에 한번 가보지 않겠느냐고 제의했다. 심양에 북한 영사관이 있는데 이곳에서 북한 여권을 발급받은 뒤 2~3일만 북한을 둘러보고 가라는 것이었다.

분명 정치적 의도가 숨어있음이 틀림없었다. 나는 완곡하게 거절했다.

그랬더니 누이는 내게 그렇다면 지도원에게 "수령님 은혜로 누이를 만나 고맙다" 란 말이라도 해달라고 부탁했다. 잘못하면 누이에게 피해가 돌아갈 수도 있겠다 싶었다.

다음날 북한의 당 지도원을 만난 필자는 "나는 중국정부의 정식 초청을 받은 인사이니 나의 북한 망명을 획책한다면 중국과 심각한 외교적 마찰을 빚게될 것" 이라고 일단 으름장부터 놨다.

그랬더니 그는 갑자기 없던 일로 하자며 태도를 바꿨다. 그리고 그에게 누이동생이 시키는 대로 고맙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러자 심각하게 굳어져있던 그의 표정이 대번 풀어지면서 만족해했다. 갈라질 대로 갈라진 남과 북을 몸소 체험한 순간이었다.

이호왕 <학술원 회장>

정리=홍혜걸 의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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