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경실련의 빗나간 후원금 요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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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대표적인 시민단체 중 하나인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이 일부 정부투자기관에 액수까지 명시한 공문을 버젓이 보내 거액의 후원금을 요청한 사실이 밝혀져 파문이 일고 있다.

더구나 공문을 보낸 시점이 경실련이 정부투자기관장의 판공비 사용내역에 대한 정보공개를 요청한 시점과 맞물려 있어 더욱 충격을 주고 있다.

경실련은 지원을 약속한 공기업이 공문이 필요하다고 해서 보내준 것이며 판공비 내역 조사와는 무관하다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경실련의 어떤 변명이나 해명에도 불구하고 공기업에 후원금을 요구한 것은 시민단체의 존립기반인 도덕성을 스스로 훼손한 빗나간 처사라고 본다. 돈을 받으면서 과연 해당 기업들의 부조리나 비리를 제대로 비판하고 고발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따지고 보면 경실련의 일탈(逸脫)행위는 대다수 국내 비정부기구(NGO)가 봉착해 있는 열악한 재정구조의 부산물이다.

지난해 4.13 총선의 '바꿔' 열풍에서 확인된 시민단체들의 막강한 영향력의 원천은 도덕성.중립성.순수성이다.

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시민의 자발적 참여에 바탕을 둔 재정자립이 확보돼야 하지만 현실은 이와 거리가 멀다.

문제가 된 경실련의 경우도 중앙회원만 1만5천명이지만 매달 회비를 꼬박꼬박 내는 회원은 3천여명에 불과하고, 이마저 최근의 경제난을 반영, 갈수록 줄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고 이런 현상을 시민들의 참여정신 부족 탓만으로 돌릴 수는 없다고 본다. 무슨 목적을 위해 어떻게 모금을 해서 그 돈을 어디에 사용했는지를 정기적으로 투명하게 공개하는 노력이 부족했던 점이 시민들의 불신과 외면을 자초한 측면은 없는지 반성할 문제다.

따라서 사실상 사문화한 '기부금품 모집 규제법' 의 개정이나 대체입법을 통해 선진국들처럼 일정 요건을 갖춘 시민단체에 대해서는 자유로운 모금활동을 허용하되 모금 내역과 용처를 철저히 공개하고 감시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일이 급선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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