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국민 속이는 정치 그만둬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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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세밑 민주당 의원 세 명의 자민련 이적(移籍)파동으로 정국은 한치 앞을 볼 수 없을 만큼 암울하고 어수선하다. 민주당 김중권(金重權)대표의 소신 정치가 바로 이같은 기습작전식 속임수 정치인가. 그를 임명한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의중이 여기에 있었는가. DJ 쇄신 정치라는 게 고작 머릿수 정치로 끝나고 마는 것인가. 실망스럽고 암담하다.

타협이 부재한 정치풍토에서 소여(小與)로 강야(强野)를 상대하기가 버거웠을 것이란 점을 이해한다. 지금까지의 정국 불안 원인 중엔 한나라당의 당파적.비타협적 태도에도 일말의 책임이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렇다고 기껏 현상 타파책이랍시고 고심하고 시도한 게 머릿수 채우기라면 이는 총선 민의에 어긋남은 물론, 국민 기대와 너무나 동떨어진 수준이다. 국민은 타협의 미학을 고대하고 있다.

21세기를 맞아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 혼신의 힘을 다해 설득하고, 그리고 한발씩 양보해 합의점을 도출해내는 진정한 민주적 과정이 보고 싶은 것이다. 이적 파동은 그러한 여망을 역행하는 처사다. 구태(舊態) 그대로 힘의 정치.술수 정치를 계속하겠다는 선언과 다름없다.

민주.자민련 양당 지도부는 "3인의 살신성인(殺身成仁)일 뿐 사전에 상의가 없었다" 고 기만적인 태도로 일관해 국민 분노를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

양당 지도부가 지난해 말부터 연기를 피운 게 DJP 공조 복원이었다. 김종호(金宗鎬)자민련 총재권한대행은 "연말까지 교섭단체를 반드시 성사시키겠다고 장담하지 않았느냐" 고 자랑까지 한다.

이적 의원 중엔 동교동 비서 출신의 핵심 인사도 포함돼 있다. 이러고도 "몰랐다" 니 국민을 바보로 취급하겠다는 것인가. 김중권 대표는 "그간 정치 불안은 자민련 실체를 인정하지 않은 데서 비롯됐다" 고 말했다. 자성은커녕 남의 탓으로만 돌리는 억지 논리에 놀라울 뿐이다. 정치 불안의 핵심은 그러한 속임수 정치탓임을 깨달아야 한다.

이적 파동으로 얻은 게 무엇인가. 시민단체들은 일제히 "반민주적 발상" 이라며 원상 회복을 촉구하고 있다. 초당적 협력을 다지던 한나라당도 격분, 대여 투쟁에 나서고 있다. 소득없이 국민 원성을 자초했고, 대결 정치판을 유도한 셈이다.

자민련은 교섭단체 소원을 이뤄 국고보조금을 더 받게 됐으니 소득이라 할지 모르나 그것은 진정한 승리가 아니다. 자민련의 강창희(姜昌熙)부총재마저 "국고보조금에 자존심을 팔았다" 는 비난을 서슴지 않고 있다.

이적 파동식 구태.속임수 정치는 총체적 난국을 더욱 꼬이게 만들 뿐이다. 이적 사태를 원상 복구하든가, 국민이 납득하는 수준의 새 정치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어떤 형태로든 이적 파동식 낡은 정치는 청산돼야 한다. 그러한 신뢰 회복의 수순이 없는 상황에서 여야 영수회담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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