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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정재의 시시각각

오노를 시상대에 못 오르게 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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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2002년 2월 17일. 꼭 8년 전 오늘 미국 솔트레이크 시티에선 쇼트트랙 1000m 결승전이 열렸다. 안현수가 막 1위로 치고 나오는 순간, 오노의 손이 안현수의 무릎을 잡았다. 안현수는 오노와 함께 나뒹굴었다. 오노는 얼른 일어나 다시 달렸고 은메달을 땄다. 첫 올림픽 메달이었다. 이때까지는 그냥 그러려니 했다.

진짜 악연은 나흘 뒤였다. 이번엔 1500m 결승전. 한국의 김동성이 1위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2위 오노는 김동성이 반칙을 했다며 두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오 노’라며. 그 유명한 ‘오노판 할리우드 액션’이다. 심판진은 김동성을 실격 처리했다. 그렇게 오노는 첫 금메달을 땄다.

가만있어도 나라가 들끓을 판이었는데 오노는 기름까지 부었다. TV 쇼에 나와 “김동성은 화풀이로 멍멍이탕이라도 먹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금메달을 훔쳐간 주제에 반성은커녕 비아냥이라니.’ 그해 한국은 오노 욕으로 나라가 시끄러울 정도였다. 오노 머리를 쏘는 게임 스크린샷이 등장했고 오노 얼굴을 인쇄한 화장지도 나왔다. ‘오노스럽다’란 말도 유행했다. ‘정상적이지 않고 술수를 쓰는 행위’는 모두 오노스러운 것이 됐다.

‘오노의 망령’이 되살아난 건 설날 아침이다. 1500m 결승전. 마지막 한 바퀴를 남기고 한국 선수 3명이 일제히 오노를 제쳤다. “와” 함성이 터졌다. 그러나 채 함성이 가시기도 전 이호석이 성시백 앞을 무리하게 파고들었다. 둘이 같이 넘어지면서 금·은·동 동시 석권의 꿈도 사라졌다. 오노는 은메달을 땄다. 어부지리였다. 로이터 통신은 ‘한국 선수의 불운을 발판 삼아 딴 또 하나의 메달’이라고 전했다. 경기 후 오노는 기다렸다는 듯 막말을 해댔다. “경기 막판에 더 많은 실격이 나오길 기대하고 있었다, 솔트레이크 시티에서처럼.”

당장 인터넷엔 안티 카페가 만들어지고, 온갖 욕설이 쏟아졌다. 오노에게 메달을 헌납했다며 이호석에 대한 비난도 빗발쳤다.

여기서 잠시 냉정해지자. 오노는 왜 그럴까. 왜 그렇게 한국과 한국 선수에게 못되게 굴까. 오노에겐 그게 성공 방정식이었을 것이다. ‘꼭 이기고 싶다. 실력은 최정상급이다. 그런데 딱 하나 걸림돌이 있다. 쇼트트랙 최강국 한국이다. 그런데 마침 한국 빙상엔 약한 고리가 있다. 파벌 싸움이며 지나친 경쟁심이 그것이다. 여기에 약간의 흥분만 더해주면 스스로 무너진다.’ 오노는 한국의 벽을 넘어서는 데 실력 대신 다른 방법을 찾은 것이다.

오노가 딴 6개의 메달은 미국 겨울올림픽 타이 기록이다. 하나만 더 따면 신기록을 쓰게 된다. 미국 언론들은 이미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500m, 1000m와 5000m 계주까지 세 번이나 기회가 있어서다. 여전히 걸림돌은 한국이다. 오노도 잘 안다. 그가 더 거칠게 우리의 반목과 분열을 부추기는 이유다.

웹상에 쏟아지는 이호석 비난 글은 그만 접자. 국민이 흥분하면 선수들도 냉정을 잃는다. 오노가 바라는 바다. 더 가슴 아플 성시백의 어머니도 “모두가 내 아들”이라고 했다지 않은가. 우리 선수끼리 똘똘 뭉치자. 오노에게 더 이상 메달을 허락하지 말자. 많이 변질됐다지만 올림픽의 멋은 순수와 열정, 아마추어리즘에 있다. 인격 미달자가 영웅이 되는 건 꼴불견이다. 그걸 막을 수 있는 건 우리 선수들뿐이다.

이정재 중앙SUNDAY 경제·산업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