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합당이 정치개혁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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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총체적 위기 국면을 맞아 대통령 국정 쇄신책에 온 국민의 시선이 집중돼 있는 시점에 느닷없이 민주-자민련 합당설과 정계개편론이 불거져 혼란스럽다.

청와대가 부인하고 자민련에선 반대 입장을 밝혀 정확한 진상은 알 수 없으나 여대(與大)가 현 정권의 오랜 숙원이었다는 점에서 예사롭지 않다.

혹시 국정 쇄신책의 핵심이 그같은 내용인지 의심도 든다. 그렇다면 엄청난 불행이 아닐 수 없다. 위기의 실체를 잘못 파악한 것이며 민심과는 거꾸로 가는 방향이기 때문이다.

큰 야당에 발목을 잡혀 정국 운영에 애를 먹고 있는 현 정권의 어려움을 이해하지만 그걸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인위적 정계개편을 검토하는 것은 정도(正道)가 아니다.

현 여소야대(與小野大) 구도는 총선 민의로서 여야가 정치력을 발휘해 타협하고 협력해 나가라는 국민적 명령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당은 정치력 발휘보다 자민련을 끌어들이는 숫자 정치.힘의 논리로만 일관해 왔다.

그것이 정국 혼란.정치 불신의 주된 이유인데도 여권은 한나라당이 사사건건 발목을 잡는다고 야당 탓만 하고 있다.

제1야당을 동반자로 여기고, 진정으로 마음을 열어 설득하거나 협조를 구하는 자세가 선행됐어야 했다. 무조건 등원, 공적자금 처리 협조 등 최근 한나라당은 예전과 다른 유연성을 보여주고 있다.

민주당은 이를 잘 활용해 수준 높은 타협의 정치 기술을 개발하려는 노력부터 기울이는 게 순리라고 본다.

마치 오늘의 국정 위기 원인이 여소야대에 있는 양 호도하고 합당을 국면 반전의 도구로 활용하려 한다면 민심의 엄청난 저항에 직면하게 된다는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노선과 색깔이 전혀 다른 두 당의 합당은 정책정당과는 거리가 먼 '비빔밥 정당' 이다. 정치 개혁의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리는 처사다.

현 정부의 개혁 작업이 헛돌고 있는 데는 색깔 다른 두 당이 공동정부를 운영하고 있는 탓도 크다. 더욱 김종필(金鍾泌)자민련 명예총재의 합당 총재설까지 나오고 있으니 3金시대의 낡은 덫에서 우리는 언제 벗어날 것인지 정말 한심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정계개편의 필요성이 있다면, 그것은 철저하게 지역 기반으로 이뤄진 정당 구조를 정책과 이념 노선에 따라 새롭게 짜는 작업일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논의도 지금은 때가 아니다. 경제가 추락하고, 정부 신뢰는 땅에 떨어져 총체적 난국을 맞고 있는 이 시점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국민적 역량을 집중시키는 작업이다.

정계개편 논의는 여야 대결 구도를 심화하고, 국론 분열을 조장할 뿐이다. 정치 개혁 논의는 1인 지배의 사당(私黨)정치를 끝내고 정당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데서 출발해야지 정략적 합당으로 흘러선 안된다. 기회만 있으면 머리를 내미는 합당설을 차제에 완전히 불식하는 조치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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