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종수의 세상읽기

진정 나랏빚이 걱정이라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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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또 다른 언론은 여기에 정부의 보증채무와 4대 공적연금의 준비금까지 합쳐 2008년의 나랏빚이 이미 1300조원에 가깝다고 선언했다. 국가부채비율은 이제 126.6%에 도달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국가부채비율(75%)을 능가하는 것은 물론 재정위기에 빠진 그리스(112.6%)와 이탈리아(114.6%)의 기록마저 훌쩍 넘어서는 수치다. 나랏빚이 이 정도라면 우리나라는 진작에 재정위기에 빠졌어야 옳다. 국가신용도는 바닥으로 추락했어야 마땅하고, 국가 부도를 겁내는 외화자금이 썰물처럼 빠져나갔어야 했다.


그러나 실상은 아쉽게도(?) 그렇지 않았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우리나라가 단기간에 재정위기에 빠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진단했고, 국제신용평가사인 S&P는 최근 우리나라의 신용등급(A, 안정적)을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일부 외국인 주식투자자금이 빠져나가긴 했지만 국가부도를 염려한 외화자금의 대규모 이탈은 일어나지 않았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재정상황은 재정위기에 빠진 나라들과 전혀 다르다. 우선 국가부채와 재정적자 규모가 훨씬 작다. 국가부채에 공기업 등의 빚까지 포함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지만, 국제통화기금(IMF)이나 OECD 기준 어디에서도 그런 식으로 나랏빚을 계산하지 않는다. 다른 나라는 국제기준에 따르고, 우리나라만 공기업 등의 부채를 합산한다면 공평한 비교가 아니다. 질적으로 봐도 그리스는 정부 부문의 대외채무가 GDP의 90%에 달해 외화자금의 유출 가능성이 크지만 우리나라는 그 비율이 2.4%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왜 그토록 나랏빚을 부풀리지 못해 안달인가. 아마도 외환위기 때 생긴 자기비하의 습성이 도졌거나,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는 속담처럼 조그만 외부 충격에도 지레 겁을 먹었기 때문일는지 모르겠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식으로 국내의 취약성을 스스로 부풀리다 보면 오히려 없던 위기를 만들 소지가 크다는 점이다. 다들 괜찮다는데 정작 당사자가 문제가 있다고 떠벌리면 남들도 정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는 법이다.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불거졌을 때 이런 식의 국내발 위기설 때문에 얼마나 큰 대가를 치렀는지를 상기해 보라.

그렇다고 나랏빚이 늘어나도 괜찮다는 게 아니다. 사실 최근 국가부채가 늘어나는 속도를 보면 걱정이다. 국가부채의 급증은 단기적으로 국가신용도를 떨어뜨려 외환위기의 빌미를 줄 수 있고, 장기적으론 재정 파탄과 성장률 둔화의 위험을 키운다. 이 때문에 국가부채가 적정한 수준을 넘지 않도록 관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빚을 잔뜩 부풀려서 동네방네 떠들고 다닌다고 빚이 저절로 줄어들지는 않는다.

나랏빚은 그동안 정부가 거둬들인 세금보다 더 많이 쓴 결과(재정적자)다. 김대중 정부는 외환위기에 대처하느라, 노무현 정부는 복지지출을 늘리느라 적자를 키웠다. 이명박 정부 또한 글로벌 금융위기 때문에 재정적자를 늘렸다. 적자를 메우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세금을 더 거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빚을 내는 것이다. 대개는 세금보다 손쉬운 부채를 택한다. 그동안 나랏빚이 갈수록 늘어난 이유다.

나랏빚이 정말 걱정이라면 빚이 많다고 호들갑을 떨 일이 아니라 빚을 줄일 방도를 먼저 찾는 것이 순서다. 그 첫걸음은 무엇보다 씀씀이를 줄이는 일이다. 들어오는 돈에 비해 적게 써야 빚을 갚을 수 있을 것 아닌가. 문제는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란 점이다. 이미 커질 대로 커진 정부지출은 앞으로 인구의 고령화가 닥치면 더 늘어나게 돼 있다. 원했건 아니건 간에 정부의 덩치는 이미 ‘큰 정부’가 돼버렸다. 큰 정부의 딜레마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금융위기 이후 거의 모든 나라가 직면한 공통의 문제가 됐다.

그대로 두면 나랏빚은 늘어나게 돼 있다. 공무원들은 기본적으로 ‘큰 정부’를 지향한다. 인심쓰기 좋아하는 정치인들도 ‘큰 정부’를 마다하지 않는다. 유권자들 역시 자기 이해가 걸린 사안에선 정부가 ‘더 큰 몫’을 해주기 바란다. 나랏빚의 문제는 결국 선택의 문제다. 국민은 각자 자신의 욕심을 접고 세금을 더 낼 각오를 해야 한다. 정치인들 역시 인기가 없더라도 정부의 몸집을 줄이겠다고 말해야 한다. 4대 연금도 더 내고 덜 받는 구조로 바꿔야 한다. 과연 누가 그런 선택을 할 것인가.

김종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