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마음이라도 너그럽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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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지난주 공정거래위원회는 4대 그룹의 부당 내부거래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1998년 두차례, 지난해 한 차례 실시해 이번이 네번째다.

네차례를 합친 이들 그룹의 부당 내부거래 규모는 20조3천억원이고 부과된 과징금이 2천1백45억원이다.

이런 나쁜 기업들이 있나 싶지만 해당 기업들의 이야기는 좀 다르다. 적법한 절차에 따라 공정한 가격으로 거래한 것이라며 1차 때부터 모두 이의신청을 제기했다는 것. 이에 대한 재판이 진행 중으로 법원 판결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해당 기업들의 명예는 땅에 떨어졌다. 공정위는 시작할 때부터 어느 그룹의 부당 내부거래를 조사한다고 발표해 마치 이들 기업에 문제가 있음을 내비쳤었다.

개인적으론 정부가 정확히 조사했을 것이라고 믿지만 발표대로 '대주주나 계열사에 특혜를 준 것' 이라 해도 이는 대주주.사장 등 일부 높은 사람들 문제다.

하지만 고통은 직원들도 받고 있다. 다니는 회사의 이미지 추락에다 많은 직원들이 물건을 만들어 파는 본업을 제쳐둔 채 재판 준비에 매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현 정부는 과거 어느 정권보다 재벌개혁을 강도 높게 추진해왔다. 빚을 줄이고 기업경영을 투명하게 하며 오너의 전횡을 막는 것은 필요한 것이다.

때늦은 감마저 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재벌은 나쁜 짓을 많이 하는 기업' 이란 경직된 이미지를 심어주는 문제도 생겼다.

현대가 서울 계동 사옥을 내놓았을 때 금융감독원이 이를 사려고 한다는 이야기가 있어 금감원 간부에게 묻자 대뜸 "지금 어느 때인데 우리를 더 죽이려고 하느냐" 고 대답했다.

급여 인상과 사무실 이전이 현안인데 정현준.진승현씨 불법대출 사건이 잇따라 불거지면서 말도 못 꺼내고 있다는 것이다.

1천명이 넘는 직원 중 이들 사건에 직접 연루된 사람은 자살한 장내찬 전 국장과 한스종금에서 6천만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된 김영재 부원장보 뿐이다.

그럼에도 직원들은 '아이들이 뉴스를 볼까 겁난다' 고 하소연한다. '금융강도원' 이란 살벌한 풍자까지 나올 지경으로 금감원 전체가 동네북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뼈를 깎는 자기 반성이 필요하다. 금감원 직원들은 크고 작은 금융사건이 터질 때마다 의혹을 받아온 점을 되새겨야 할 것이다.

차제에 감독 체계를 확 뜯어고쳐야 한다는 여론도 높다. 그러나 일방적인 매도는 감독 업무를 제대로 집행하는 데에도 지장을 줄 수 있다.

금감원의 한 간부는 "내부 사기가 말이 아니고 밖으로는 금융기관들이 우습게 볼까 걱정" 이라고 말했다.

비난은 쉽지만 당하는 입장에선 회복 불가능할 정도의 타격을 입는 경우가 많다. 잘못은 지적하고 수정하되 전체를 싸잡아 폄하는 하지 말자.

정치권은 오늘도 소모성 정쟁을 벌이고 있고, 너도 나도 공적 자금을 달라고 아우성이다. 도덕적 해이 현상이 여기저기서 벌어지는 등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들이 터져나오는 근저에는 집단 이기주의와 갈등 구조가 도사리고 있다.

남을 탓하기 전에 자기부터 살피고, 남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자세를 갖추기 전에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이다.

스스로에게는 엄격하고 남에게는 관대한 마음을 갖는 게 실타래같이 얽힌 난제들을 푸는 시발점이 될 수 있다.

내년 경기가 나빠질 것이란 전망이 많다. 경제가 어려워지면 우리네 삶도 각박해지기 십상이다.이런 때일수록 마음이라도 너그럽게 갖자.

민병관 <산업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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