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가벼운 글쓰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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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해마다 이맘 때면 열병을 앓는 이들이 있다.

신문사에 시나 소설을 보내놓고 가슴 졸이며 결과를 기다리는 작가지망생들이다.

본지의 경우 올부터 신춘문예 대신 '중앙신인문학상' 이란 이름으로 새 등용문을 열었지만 지금도 대부분의 신문사가 '수십년째 '신춘문예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현재 신문사별로 심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늘 그렇듯 고뇌의 흔적이 담긴 수작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작품도 많다고 한다.

특히 컴퓨터에 익숙한 신세대 응모자들 중에는 인터넷 게시판에 글을 올리듯 '가벼운 글쓰기' 로 일관한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19세기 프랑스 사실주의 문학의 거봉(巨峰)인 오노레 드 발자크만큼 가벼운 글쓰기의 폐해를 잘 보여준 사례도 드물다.

청년 시절의 발자크는 오로지 돈을 벌 목적으로 '소설공장' 을 차린 일이 있다.

스스로 사장이면서 종업원인 1인공장이었다.

싸구려 연애소설에서 소책자나 팸플릿까지 주문자의 입맛에 맞춰 닥치는 대로 글을 썼다.

사흘이면 잉크병 하나가 비고 펜이 열개나 닳아 없어질 정도로 그는 공장을 풀가동했다.

'사기꾼에게 속지 않는 법' 도 썼고, '한푼도 쓰지 않고 빚쟁이를 만족시키는 방법' 이란 책도 썼다.

발자크가 공장문을 닫고 본격적인 문학의 길로 들어선 후에도 가벼운 글쓰기의 흔적을 어쩔 순 없었다.

평전(評傳)의 백미(白眉)로 꼽히는 '발자크 평전' 에서 오스트리아 출신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는 그 흔적을 "단골손님처럼 드나든 문학의 사창가에서 얻어온 들척지근한 향수냄새" 라고 표현했다.

발자크는 절망감에 빠져 원고와 교정쇄를 이 잡듯 했지만 잡초를 완전히 제거할 순 없었다.

문학적 형성기에 자신에 대해 지저분하게 군 결과라고 츠바이크는 평한다.

창작은 자판 위를 손가락으로 달리는 신나고 즐거운 행위가 아니다.

체험과 상상력을 가슴과 머리로 담아내는 피말리는 작업이다.

1970년대 초 신춘문예로 등단해 수십권의 베스트셀러를 봇물처럼 쏟아냈던 소설가 박범신은 "내 상상력의 불은 꺼졌고 나는 기가 빠진 무당과 같다" 며 한때 절필을 선언했었다.

삶과 문학에 대한 잔인한 앙갚음 때문에 절필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언어는 잠시라도 자신에게 무관심하고 진정한 참을성으로 사랑을 구하지 않고, 자신을 창녀처럼 이용한 예술가에게는 '극히 '가혹하게 복수를 한다.

" 가벼운 글쓰기에 대한 츠바이크의 준열한 경고다.

배명복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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