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설 밑에 이 무슨 치졸한 싸움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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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국민들은 짜증이 난다. 사흘째 이어진 이명박 대통령의 청와대 측과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느닷없는 ‘강도(强盜) 논쟁’을 지켜보면서다. “잘되는 집안은 강도가 오면 싸움을 멈추고, 강도를 물리친 뒤 다시 싸운다”(9일, 청주의 이 대통령)→“집안에 있는 한 사람이 강도로 돌변하면 어떡하느냐”(10일, 박 전 대표 )→“예의도 없나. 대통령 폄하 해명하고, 공식 조치하라”(11일, 청와대 이동관 홍보수석)→“문제가 있다면 있는 대로 처리하면 될 것 아니냐”(11일, 박 전 대표). 세종시 정국이 급기야 권력 1인자와 2인자의 정면충돌로 증폭되는 형국이다.

우선 사실관계다. 청와대 측은 “강도 얘기는 이 대통령이 자주 해온 말로 글로벌 경쟁에서 우리가 화합하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대통령은 2008년 11월 LA동포간담회에서 “세계적 경제위기에서 우리가 지혜를 발휘하자. 되는 집안은 형제가 칼 들고 싸우더라도 강도가 들어오면 중지하고 강도와 싸운다”고 언급했다. 대선 경선 때부터 이런 비유를 누차 해온 건 맞다.

이대로라면 박 전 대표가 일부 언론의 확대 해석에 과민 반응한 게 아니냐는 지적을 받을 수 있다. 여기에 박 전 대표의 의사표현 형식에도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국회 본회의장 입구의 기자들에게 단문(短文) 몇 개를 던지고 사라지는 그의 스타일은 수도권 규제완화, 미디어법, 세종시 현안 등 고비 때마다 반복됐다. 그러나 다섯달 넘게 온 나라를 분열의 수렁에 빠뜨린 세종시 문제만큼은 ‘외마디 정치’와 접근방식이 달라야 했다.

그는 우리 정치의 어른 격이다. 이에 걸맞게 기자회견, 정책간담회 등의 공식적이고 품격 있는 절차를 통해 원안 고수의 진정성과 논리, 수정의 문제점 등을 진지하게 설득했어야 옳다. “말귀를 못 알아 듣는다”고 치부하고 사라져버릴 상황이 아니다. “수정안·원안의 우열 비교 토론엔 불참하겠다”는 친박계 측의 강경 입장 역시 열린 대화의 태도를 벗어난 모습이다.

이 대통령과 청와대도 빌미를 준 측면이 있다. 대선 경선 때의 앙금이 고스란히 쌓인 터에 “우리를 고사시키려 몰아붙인다”며 친박계가 눈 부릅뜬 형국이 아닌가. 굳이 ‘강도’란 자극적 단어에다 “나는 일 잘하는 사람을 밀고 싶어한다”는 오해 소지의 발언을 꺼낸 것엔 신중함과 배려가 부족했다.

미생지신(尾生之信), 증자의 돼지 등 치졸한 고사(故事) 싸움으로 티격태격하던 세종시 논의가 급기야 최고권력층의 막말·감정 대치로까지 번졌으니 정말 딱한 노릇이다. 22조원씩이나 들여 벌판 위에 297㎢의 도시를 짓는 국가적 과제의 본질은 도대체 어디로 증발한 것인가. 말꼬리 잡기와 죽기 살기식 세 대결, 헛껍데기 논쟁으로 날을 새운다면 나라 꼴은 도대체 뭐가 되는가. 가뜩이나 내일부터 설 연휴다. 국민들의 설 명절을 망칠 셈인가.

정치권은 본질을 벗어난 변죽 울리기를 중단하고, 국회라는 토론·대화의 장으로 즉각 복귀하라. 끝장토론의 각오로 말이다. 청와대와 박 전 대표 측은 말꼬리 잡기의 옹졸한 싸움을 당장 집어치우고, 두 지도자가 직접 대화·타협할 수 있는 묘안을 찾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