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 약올린 곰들의 번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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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요…. 일부러 피한 건 아닌데 인색했네요. 포스트 시즌이니까 이제 슬슬 적극적으로 대볼까요."

지난 13일 대구구장에서 열린 삼성과의 프로야구 플레이오프 1차전을 앞두고 두산의 김경문(사진) 감독은 번트 얘기가 나오자 이렇게 말했다. 얼굴에는 빙그레 웃음을 담은 채로였다.

김 감독 스스로 인정하듯 두산은 이번 시즌 좀처럼 번트를 대지 않았다. 두산의 희생번트는 고작 55개로 8개 구단 중 가장 적다. 바로 위인 7위 LG와도 무려 18개 차이다. 1위 현대(111개)에는 절반에도 못 미친다. 2위 SK도 105개의 희생번트를 댔다. '잔재주'를 피우지 않는 우직한 곰의 모습 그대로다.

그러나-. 곰들도 마음만 먹으면 잔재주를 넘는다. 그것도 아주 잘 넘을 수 있다. 13일 1차전에서 두산은 4회 무사 1루에서 장원진의 희생번트로 1사 2루를 만든 뒤 삼성의 선발투수 김진웅의 폭투 때 주자가 홈을 밟아 선취점을 올렸다.

6회 무사 1루에서도 두산은 번트 작전을 택했다. 장원진이 댄 희생번트가 행운의 내야안타로 연결되자 후속 최경환이 또 희생번트를 대 1사 2, 3루의 기회를 만들었다. 두산은 이 기회에서 이스라엘 알칸트라의 적시타 등을 살려 3점을 보탰다. 잇따른 번트로 '적진'에서 소중한 첫 승을 따낸 것이다. 곰들이 시즌 내내 갈고 닦은, 그러나 숨겨온(?) 번트 실력을 마음껏 뽐낸 날이었다.

경기 전 미소에 섞어 은근슬쩍 작전을 밝혔던 김 감독. 기억하는 이들은 적지만, 사실 그는 번트의 달인이다. 1982년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3-3으로 맞선 9회초 두산(당시 OB)의 선두타자로 나서 기습번트를 성공시킨 선수가 바로 '포수 김경문'이었다. 이 번트 하나로 공격에서 물꼬를 튼 두산은 8-3으로 승리, 영광스러운 프로야구 원년 챔피언에 오를 수 있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김 감독의 번트에 무너진 팀이 다름 아닌 삼성이었다는 점이다. 삼성은 23년 만에 또 포스트 시즌에서 '김경문표 번트' 때문에 치를 떨어야 했다.

김 감독은 다른 작전도 구상 중이다. "결정적인 순간에 기습번트나 스퀴즈 번트도 시도해 볼 생각입니다. 재미있겠지요?"(웃음)

대구=남궁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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