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신간] 쿤데라 장편소설 '향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7면

밀란 쿤데라도 향수병에 걸렸는가.1929년 체코 프라하에서 출생해 공산당의 탄압을 피해 75년 프랑스로 망명해 작품활동을 펼치고 있는 쿤데라의 장편소설 ‘향수’(박성창 옮김·민음사·8천원).

프랑스어로 쓰여졌지만 지난 5월 스페인어판으로 먼저 나온 이 책은 출간 한달만에 10만부 이상 팔리며 “쿤데라가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는 호평을 받은 작품이다.

이 작품은 공산정권 붕괴 이후 프라하를 찾는 남녀 망명자를 통해 그려본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 현대판이다. 물론 율리시즈의 신화적 전쟁과 모험이 아니라 상실과 망명의 현재, 쿤데라 특유의 역사, 섹스와 사랑, 실존이라는 삶의 삼각틀 안에서 움직인다.

“체코어로 표현된 가장 감동적인 사랑의 문장은 ‘나는 너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다’인데 이는 ‘나는 너의 부재로 인한 고통을 견딜 수 없다’는 뜻이다.

이렇듯 어원상으로 볼 때 향수는 무지의 상태에서 비롯된 고통으로 나타난다.너는 멀리 떨어져 있고 나는 네가 어찌 되었는가를 알지 못하는 데서 생겨난 고통,내 나라는 멀리 떨어져 있고 나는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하는 고통 말이다.”

작품 앞 부분은 ‘향수’에 대한 설명에 상당 부분 할애된다.그러면서 향수는 단순히 고향에 돌아갈 수 없는데서 비롯된 슬픔이 아니라 잃어버린 것, 근원적으로 없었던 것에 대한 회복이나 그리움 차원으로 나간다. 프랑스어 원제 ‘L’ignorance’(무지)를 ‘향수’로 번역한 것도 이 때문이다.

“점령 세력은 1969년 가을에 강제적으로 진주했듯,1989년 가을 아무도 예기치 못한 상태에서 부드럽고 예의 바르게 물러났다.”

그 20년간 각각 프랑스와 덴마크로 망명해 살고 있던 이레나와 조제프는 밤마다 쫓기는 악몽을 꾼다. 그러면서도 일할 때마다 조국에 대한 추억을 떠올린다. 해서 작가는 망명의 삶을 “낮은 버림받은 조국의 아름다움으로 빛났으며 밤은 그곳으로 돌아간다는 두려움으로 빛났다”고 묘사하고 있다.

남편을 따라 망명한 이레나는 남편이 죽자 가정부 등 모든 잡일을 하며 이제 파리에서 자리를 잡고 살고 있다. 구스타프라는 연상의 애인도 두고서. 어머니와의 어린 시절이나 그 때 고국의 풍광 등을 그리며 귀국길에오른 이레나는 비행기 안에서 결혼전에 프라하에서 잠깐 만났던 남자 조제프를 만난다.

고향에 돌아온 조제프는 형으로부터 사춘기 시절 자신의 일기를 전해받는다. 소녀의 파르르 떠는 입술만 보고도 오르가즘을 느꼈고 또 원초적 질투심에 가득찼던 그 사춘기적 일기를 보며 조제프는 일기장을 찢어버리고 이레나와 만나 정사를 벌인다.

“추잡한 말들의 폭발 속에 이루어진 완전한 합의!아, 그녀의 삶은 얼마나 불쌍했던가!그녀가 놓쳐버린 모든 죄악들과 실현되지 않은 모든 부정들, 그녀는 이 모든 것을 탐욕스럽게 살고 싶었다”

같은 시각 이레나의 엄마와 정부 구스타프도 섹스에 탐닉한다. 가볍게 살고 싶은 도피처로서 택했지만 자신의 온 삶을 바치는 이레나의 진지함에 구속감을 느낀 구스타프는 그녀의 엄마와의 섹스에서는 자유를 만끽한다.

작품 말미의 이 두 섹스를 통해 쿤데라는 율리시즈의 귀향은 행복했는가를 묻고 있다. 낙원 같은 섬과 사랑의 여신을 다 마다하고 10여년만에 돌아간 이타카와 아내 페넬로페가, 그리던 그 모습이었을까를 묻는다. 그리고 그 남녀들은 또 떠난다. 도달할 수 없는 그리움을 향해서.

이 작품집 앞뒤에는 서문이나 해설을 싣지않았다. 쿤데라 소설의 특징은 작가가 직접,혹은 등장인물을 통해 끊임 없이 사색, 해석해가며 아무리 하찮은 것과 행동에도 그 의미의 본질을 돌려준다는 데 있다.

특히 이번 작품에서는 망명을 통해 정치적 측면에서는 공산주의와 자본주의,그 떠돎의 측면에서는 시간 속의 나그네일 수 밖에 없는 삶의 숙명을, 그리고 섹스를 통해서는 삶의 본원적 결핍과 욕구의 합일의 순간을 보여주고 있다.

이경철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