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너리티의 소리] 노숙자 건강에도 관심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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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겨울이 시작되었다. 경제사정이 어려워져서 그런지, 서울역 지하도엔 매일 밤 추위 속에서 잔뜩 웅크린 채 잠을 청하는 노숙자들이 적지 않다.

거리에 내팽개쳐진 노숙자들 대부분은 오랜 바깥생활로 몰골이 말이 아니다. 국제통화기금(IMF)체제 이후 언젠가 부도가 난 회사 사장이 노숙자 대열에 끼인 것으로 알려졌고, 당시에는 그런 사람들로 인해 일반인들이 노숙자들을 동정의 눈길로 바라보기도 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도 그들 내부에서 재활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자, 결국 그들을 다른 성실한 사람들에게 의지해서 쉽게 먹고 살려는 파렴치한 집단으로까지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지하도나 쉼터, 서울역.영등포역 근처 쪽방에서 그들을 직접 만나보면, 일반인들의 편견과는 완전히 다른 공통된 특성들을 가지고 있음을 금방 알 수 있다.

실제로 대부분은 평생 정신적.육체적으로 많은 상처를 받아온 아주 '여린' 사람들이고, 지금까지 겪은 좌절 때문에 삶의 의지가 많이 꺾였지만 그래도 여전히 어떻게든 스스로 일하면서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는 것이다.

또한 그들도 사람인지라 자신에게 '관심' 을 보여주는 사람에게는 호의적이며 고마워할 줄 알고, 그들 내부에 서로를 배려하는 나름대로의 건강한 질서도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보통 노숙기간이 길어질수록 사람은 더욱 황폐해진다. 처음에는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잠시 노숙생활을 견디면서 재기하겠다' 고 맘먹었던 사람들이 '질병→노동력 상실→정신적 좌절→정신.육체의 황폐화' 과정을 거쳐 결국에는 만성적인 노숙자로 전락하게 된다.

그동안 우리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회원들이 거리와 대규모 쉼터의 노숙자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를 보자.

그들의 20% 이상에서 중등도 이상의 간기능 장해가 있으며, 결핵을 포함한 만성 소모성 질환이 일반인들의 두 배 정도까지 확인됐고, 약 10%에서 불안증.우울증.공포증.주요 정신병 등 정신.심리적 이상을 보이고 있다.

또한 전국실직노숙자대책 종교.시민단체협의회의 실태조사에선 노숙자 쉼터 1백7곳에 사는 4천3백74명 가운데 7.2%에서 알콜 의존성이 확인되기도 했다.

미루어 짐작하듯이 노숙자들의 황폐화 고리를 끊어주는 1차적 접근은 건강문제여야 한다. 물론 그들을 받쳐주는 가족이나 동료 혹은 공식적인 사회적 안전망 등의 지원체계가 어느 하나라도 제대로 작동한다면 '황폐화' 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불행히도 우리의 현실은 그런 기대를 전혀 할 수 없는 실정이다.

따라서 우선 건강문제에 초점을 맞춰 정책을 수행하되 단기적으로는 중앙 및 지방정부의 노숙자 의료구호비를 공식화하고, 턱없이 부족한 의료구호비를 현재 연 10억원에서 20억원 이상으로 현실화해야 한다.

장기적으로는 형식상 자격요건에 못미쳐 기초생활보장 수급권자에서 탈락돼 의료보호도 못받는 이들을 위해 실질적인 '의료부조제도' 를 도입해야 할 것이다.

또한 서울역.영등포역 등 노숙자 밀집지역에는 '상설 현장진료소' 를 마련해 직접 찾아가는 방식으로 운영해야 하며, 간단히 치료할 수 없는 환자의 경우는 선의를 가진 민간의료기관을 포함한 상급병원시설로 즉각 보낼 수 있도록 '노숙자 의료전달체계' 의 구축도 병행돼야 한다.

그리고 딱히 선긋기가 힘든 경계성 정신질환자나 일반적 알콜중독자를 적절히 치료.관리할 수 있는 '노숙자 보호시설의 특성화' 작업도 필요하다.

그밖에 '노숙자 건강실태 데이터베이스(DB)구축과 활용' , 전문적인 의료인력의 '노숙자 의료정책 결정 과정에의 참여' 도 보장돼야 한다.

겨울은 노숙자들에게 너무 힘든 계절이다. 우리의 '가난하고 여린' 그 이웃들에 대한 지나친 편견과 과도한 기대는 일단 접어두자. 지금 우리 사회는 우선 그들의 건강을 지켜줌으로써 그들이 어떻게든 다시 자립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줘야 할 것이다.

추운 겨울에 맞서 우리 모두가 함께 만들어가는 따뜻한 세상을 기대해 본다.

주영수 <인의협 의료사업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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