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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이 남의 손에 몸을 맡길 때 외세는 조선 땅을 삼키고 있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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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호 31면

<1> 서울 정동의 옛 러시아공사관 전망대 남쪽 창문을 통해 내려다본 서울시 모습. 덕수궁에서 남산에 이르는 시내가 한눈에 보인다. <2> 내부의 벽돌 교체 등 2년에 걸친 보수공사를 마치고 2009년 12월 새롭게 단장한 전망대. <3> 전망대 안엔 한 사람이 겨우 오르내릴 수 있는 좁은 나무계단이 있다. <4> 건물 터 지하에 나 있는 V자형 비밀 통로. <5> 건축가 사바친이 설계한 러시아공사관의 원래 모습. 신동연 기자·중구청 제공

덕수궁 돌담길은 꿈의 산책로다. 바람 불어도 좋고 비가 오거나 눈이 오면 우산 속에서 보는 풍경이 더욱 운치 있다. 해맑은 휴일이라면 연인이나 가족끼리 나들이 코스로 최고다. 궁궐과 유서 깊은 건물들이 개화기 격동의 역사를 속삭인다.

사색이 머무는 공간<29> 정동 옛 러시아공사관

정동공원과 옛 러시아공사관이 새롭게 단장되었다. 공원에는 소나무를 심고 정원을 손질했다. 옛 러시아공사관은 화려한 르네상스 양식의 건축물이었는데 6·25전쟁 때 파괴되고 지금은 건물 일부였던 3층 전망대만 우두커니 남아 있다. 정동에서 가장 높은 언덕배기에 자리 잡은 러시아공사관은 사대문 안을 조망할 수 있는 최고의 부지였다. 지금처럼 높은 건물들이 없던 구한말 당시에는 경복궁과 경운궁(덕수궁)은 물론 주변의 여러 나라 공사관 동정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공교롭게도 3층 전망대만 남아 있어 시시각각 동태를 파악해야만 했던 당시의 이 땅 사정을 연상하게 만든다. 러시아공사는 본국 외무장관에게 수시로 통신문을 보냈고 황제에게 보고되었다.

미국·영국 공관도 감시하기에 좋아
“서울에서 좋은 공사관 부지를 찾았다. 이 언덕에서 조금 떨어진 낮은 곳에는 미국공사관, 영국 총영사관 등이 자리해 있다. 조선 조정은 언덕 주변을 포함해 약 2㏊를 2200달러(현 시세로 약 2억원)에 매입할 것을 제의해왔다.”

1885년 11월 2일, 제정 러시아의 초대 서울 주재 대리공사 베베르는 본국 외무부에 비밀 전문을 보냈다. 러시아 외무부는 공사관 부지 구입자금을 즉시 송금했다. 석 달 전, 부지 구입비를 5000달러로 예상하고 상신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조선 관리들은 절반 가격 이하의 헐값으로 넘겨버렸다(『대한제국 비사』, 노주석).

러시아공사관 건물은 한·러 수호조약이 체결된 1885년에 착공돼 1890년 준공됐다. 1883년 여름, 고종은 중국 상하이에 있던 러시아 건축가 사바친(A.I.S. Sabatin)을 초빙한다. 유럽식 정주지(定住地)의 설계와 관청 건물의 건축을 맡긴 것이다. 사바친은 그해 9월 조선에 도착했고 첫 설계작품이 러시아공사관 건물이다. 독립문과 덕수궁 중명전·정관헌도 그가 설계했다.

을미사변으로 민비가 시해되자 고종은 신변의 위협을 느꼈다. 틈을 노리던 고종은 세자(순종)와 함께 궁녀처럼 변장하고 경복궁을 빠져나와 러시아공사관에 숨어들었다. 두 대의 가마는 1896년 2월 12일 오전 7시30분, 공사관에 안착했다. 러시아 해군대령 몰라스가 이끄는 100명의 수병과 60명의 육군이 공사관을 호위했다. 이범진을 중심으로 한 친러파와 엄 상궁, 러시아공사의 합작품이 바로 아관파천(俄館播遷)이다. 아관, 곧 아라사 공관으로의 파천(왕의 피신)은 375일 동안이나 이어져 주권을 잃은 슬픈 역사의 교훈을 남겼다.

을미사변 직후 일본 세력을 배경으로 조직된 김홍집 내각이 좌초됐다. 총리대신 김홍집, 어윤중·정병하가 피살되고 유길준·장박 등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박정양과 이범진·이완용 등의 친러파 내각이 들어섰다. 공사관 측은 고종에게 방 2개를 내주었고 각부 대신들은 병풍을 치고 임시사무실로 사용했다. 러시아 제국 국기가 게양된 이곳에서 국사가 행해졌다. 베베르 공사는 수시로 고종과 독대하며 국사를 좌지우지했다. 압록강 연안과 울릉도의 삼림채벌권, 경원·종성의 광산채굴권, 경원전신선 시베리아 연결권, 인천 월미도 저탄소 설치권 등 수많은 이권사업이 러시아로 넘어갔다. 이에 구미 열강도 동등한 권리를 요구해 경인·경의선 철도부설권 등 큰 이권이 값싼 조건으로 외국에 넘어갔다. 조선은 그렇게 민족자본 형성의 기회를 잃어갔고 식민지 예속경제를 자초했다.

고종의 공사관 생활은 수인(囚人)과 다름없었다. 경비를 맡은 러시아군은 대포까지 끌고 와 고종의 환궁을 요구하는 일본군과 대치하기도 했다. 고종은 비좁은 방에서 집무하다가 공사관 뜰을 관망했고 이따금씩 두려움에 떨며 이웃한 경운궁의 노대비(명헌 태후)를 찾아가 문안을 드렸다. 옛 러시아공사관과 덕수궁의 비밀통로설이 이 때문에 나왔다. 덕수궁 정관헌 지하에 러시아공사관과 연결된 지하통로가 있었는데 현재는 시멘트로 막았다는 것이다.

소문 떠돌던 비밀통로 흔적은 못 찾아
중구청과 덕수궁 관리소의 도움을 받아 정관헌 지하실을 탐사했다. 터널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정관헌은 덕수궁 경내의 동쪽에 치우쳐 있어 북서쪽 러시아공사관과는 거리가 너무 떨어져 있다. 오히려 미 대사관저 사이에 일제가 궁궐터를 잘라낸 도로 언저리나 그 너머의 중명전(수옥헌)이 거리상으로 훨씬 적합한 곳이었다. 보수하느라 아직 공개하지 않고 있는 중명전도 조사했다. 거기서도 비밀통로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옛 러시아공사관 지하에는 밀실과 비밀통로가 있었다. 지하 밀실은 7m×4m의 장방형 평면으로 돌과 붉은 벽돌로 쌓여 있었다 하는데 지금은 평평하게 메워져 있다. 서울시는 1981년 문화재관리국과 공동으로 유적을 발굴한 바 있다.

건물이 있었던 북동쪽에 동서로 20여m 길이의 V자형 비밀통로가 나 있다. 한 사람이 머리를 숙이고 드나들 수 있는 좁은 통로는 벽돌과 석회로 마감했고 중간 북쪽에 왕복 통행 시의 대기공간으로 보이는 폭 50㎝, 길이 5m가량의 터널이 나 있다. 이 옹색한 비밀통로로 고종은 왕세자와 함께 경운궁 나들이를 했던 걸까? 문제는 공사관 안쪽이 아니라 바깥쪽 루트다. 사방으로 내리막이기 때문에 비밀통로를 만들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미국 사진작가 잭슨(W.H. Jackson)이 1896년 찍은 사진에는 러시아공사관 동북쪽 후문에서 덕수궁으로 이어진 돌담길이 보인다. 고종은 이 길로 경계를 갖추고 노대비를 예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루머로 떠도는 고종의 비밀통로를 추적하면서 우리 역사의 개기일식에 해당하는 아관파천의 비극이 떠올라 마음이 착잡했다. 한 나라의 제왕 된 자가 번듯한 궁궐을 버리고 남의 나라 공관에 피신한 이 구차한 사건은 당시의 여러 상황논리를 감안하더라도 스스로 주권통치를 포기한 행위가 아닌가. 고종은 아관파천 기간 동안 엄 상궁과의 사이에서 마지막 황태자 이은(李垠)을 낳는다. 공교롭게도 황태자의 이름 은(垠) 자가 끝 혹은 낭떠러지를 뜻하는 글자다.

1897년 2월 25일, 고종은 러시아의 영향에서 벗어나라는 내외의 압력을 받고 경운궁으로 환궁한다. 그리고 그해 10월 12일 오전 2시에 황제 대관식을 거행한다. 국방력도 외교력도 없는, 지상에서 가장 초라한 대한제국의 탄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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