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떠나니 새 사랑이 오더라...계절 바뀌듯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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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호 04면

시나리오 작가와 감독 입장에서 로맨틱 코미디만큼 새롭게 포장하기 어려운 장르가 또 있을까. 그 과정을 아무리 험난하게 꼬아 놓는다 한들 ‘그래서 둘은 사랑에 빠졌대요’ 식의 결말에는 이제 관객들이 눈길도 안 주니 말이다. 좀 더 생활밀착적이면서도 구질구질하지 않은, 산뜻한 로맨틱 코미디는 정녕 없을까. 설마 ‘브리짓 존스의 일기’ 이후 대가 끊긴 건 아닐 텐데.

영화 ‘500일의 썸머’, 감독 마크 웹, 주연 조셉 고든 레빗·주이 데샤넬

지난달 21일 개봉한 ‘500일의 썸머’는 이런 고민의 한가운데에서 짠 하고 등장한 영화다. 제목의 ‘썸머’는 여름이 아니다. 여주인공의 이름이자 남자 주인공 톰(조셉 고든 레빗)이 첫눈에 반한 참한 여성이다. 남자들의 로망 긴 생머리에, 앞머리까지 정갈하게 내려 고전미를 폴폴 풍긴다. 그러니까 제목은 ‘썸머와 함께한 500일’쯤 될 거다. 톰은 카드 회사의 카피라이터다. 카드에 들어가는 달콤한 문구를 생각해내는 일을 한다. 그는 사무실에 새롭게 등장한 비서 썸머(주이 데샤넬)를 보자마자 운명적 사랑이라고 확신한다. 물론 그 증거는 미약하다.

자기만 좋아하는 줄 알았던 ‘더 스미스(The Smith)’의 음악을 그녀도 즐기더라는, 아주 하찮은 사실에도 톰은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이제 막 사랑을 발견한 청년의 떨림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건 둘의 엘리베이터 안 대화다. “주말 어땠어요?”(톰) “너∼어무 좋았어요.”(썸머) 톰은 상심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저 여자는 남자가 있는 게 분명해. 그렇지 않고서야 가벼운 인사말에 어떻게 ‘너∼어무’라고 강조에 강조를 거듭할 수 있느냔 말이지. 자, 이쯤 되면 분명하다. 톰은 사랑에 빠졌을 때 우리 모두가 보여줬던, 그리고 앞으로도 보여줄 자화상인 것이다.

영화는 시간 순서대로 500일을 보여주지 않는다. 지그재그식으로 시간을 오가며 사랑의 약속이란 게 얼마나 모순되고 허망한 것인지를 들춘다. 둘의 첫 만남에 이어지는 장면은 여자의 변심이다. 남자는 묻는다. 사랑은 뭘까. 아니, 여자는 대체 뭘까. 남녀 사이에 사랑의 공용어가 생기려면 숱한 시행착오가 쌓여야 한다는 사실을 톰은 몰랐을 거다. 하긴 서로의 속내를 정확히 알 수 있다면 이 세상에 실패할 연애가 어디 있겠는가.

시종일관 쿨하게 연애의 본질을 짚어나가는 ‘500일의 썸머’는 아주 인상적인 엔딩을 선사한다. 카드 회사를 그만두고 오랜 꿈이던 건축가가 되기 위해 면접을 보는 톰. 거기서 새로운 사랑이 될 듯싶은 여자를 만나 데이트 신청을 한다. “저는 톰이에요.”(톰) “전 어텀(autumn·가을)이라고 해요.” 그렇다.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오듯, 한 사랑이 가고 나면 다른 사랑이 온다. 그게 사랑이다. 그러니 지금 사랑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하늘이 무너진 듯 굴 이유가 없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런 얘기를 들려준 로맨틱 코미디가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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