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e칼럼

모르는 거야 모르는 척 하는 거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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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얼마 전부터 한 팬시용품 업체와 계약을 맺고 공동 작업을 하기 시작한 프리랜서 시각 디자이너입니다. 혼자서 디자인부터 제품 생산까지 다 하는 1인 기업을 구상했지만, 온갖 잡일에 매달리는 시간이 너무 많아 정작 디자인 작업에 몰두할 시간을 확보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이 회사와 일을 함께 하기로 했죠. 마침 제안도 들어왔고, 그냥 편하게 디자인에 열중해보자고 마음을 먹었는데, 어라? 내 작품이 본래 의도했던 것과 달리, 사전 협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제품에 활용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A : 나와 상담하는 자리에서 그녀가 설명한 상황 개요다. 설명이 많이 부족해서 이해가 어려울 테니 그녀가 처한 상황 속으로 좀 더 깊이 들어가 보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지만, 잠시 누르고 활짝 웃는 표정으로 사장실로 들어선 그녀에게 사장이 던진 첫 마디는 이것이었다고 한다. ‘어때, 이번 제품, 맘에 들지 않아?’ ‘아~ 예, 뭐~’ 속사포처럼 이어진 사장의 말은? ‘반응이 좋아서 말이야. 시리즈로 만들어볼까 해’ ‘옝?’

이번 작품이 어떤 작품인데? 아트북 형태로 만들자고 그렇게 말했건만, 본때 없이 머그잔에 올리더니, 이제는 시리즈를 내자고? ‘그건 말이죠. 한데 모아져야 의미도 있고, 또 가치도 높아지는 거라고, 제가 몇 번이나 말씀드렸잖아요?’ ‘그랬었나? 하여간 말이야 이번에 이 머그잔 시리즈 수출도 추진해보려고 해!’ ‘아~ 사잔님? 이런! 말도 헛나오더라는.

그래도 할 말은 해야겠다 싶어 던진 말은? ‘그래도 본래대로 가는 것이?’ ‘마침 잘 왔어, 여기 새로 생긴 중국집에 가서 밥이나 먹자고.’ 그리고는 직원들을 이끌고 우르르. 결국 그녀는 그 날도 제대로 항의 한 번 못하고 되돌아오고 말았다고 한다.

‘절대 안 된다’고 말했어야 하는데, 말도 제대로 못 꺼내고 돌아오는 스스로를 자책하면서. 그 참혹했던 점심시간에도 ‘헤헤’ 거리며 웃음을 날린 바보스러움에 끙끙거리면서, 속으로 스트레스가 먹구름처럼 몰려오는 것에 몸서리치면서.

아니, 왜 매번 이런 식으로 끝나는 걸까? 도대체 그 사장이라는 작자는 내가 하는 말을 못 알아듣는 거야,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는 거야? 다시 한 번 단호한 모습을 보이기로 마음먹은 그녀는 자신의 디자인을 도로 넘겨받아서 차라리 출판을 하기로 하고 전화기를 들었는데...

‘사장님, 전데요. 아무래도 머그잔은 그렇지 않나 싶어요. 그래서 이미 쓴 거 말고 나머지 디자인은 돌려~’ ‘어 잠깐 휴대폰이 왔네. 내가 조금 있다고 연락할 께, 뚝!’ 이런 우라~ 시베리~ 확! 하지만 막을 수 없었고. 사장은 다시 연락이 없었다고 한다. 다만 며칠 뒤, 실무자가 기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와 머그잔 시리즈 수출 건이 성사되었다는 소식만 전했을 뿐.

‘이건 그 자의 문제가 아니고, 나의 문제야.’ 그녀가 내린 결론이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가 있는 걸까요?’ 그녀가 내게 물어왔다. 나의 대답은? ‘화법에 문제가 있다.’ 그랬다. 너무나 여성적인 그녀는 여성 특유의 ‘돌려 말하기’ 화법을 구사했고, 그 자는 보통의 수컷들이 그렇듯이 그 말에 담긴 의미-그런 말을 하기 전까지 그녀가 얼마나 고민을 많이 했으며, 탁 까놓고 말하지 않을 뿐이지 내심 화가 단단히 나 있다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미련한 수컷들은 꼭 집어서 말해주지 않으면, 정말로 모/른/다! 아마 그 사장은 그녀의 말을 세상물정 모르는 철부지 예술가의 ‘투정’ 정도로 이해했을 것이다. 그래서 별로 심각하지 않게 생각하고 있고, 적당히 ‘달래면 그만’일 문제로 보고 있을 것이다.

계약서에 앞서 서로 믿고 일하자는 것이 그 사장이 늘 하는 말이라고 한다. 하지만 계약서 내용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해 일하면서, 문제제기를 하면 자기를 못 믿느냐고 반문하는 데에는 정말 환장할 노릇이었다는 것 아닌가? ‘나도 당신을 믿고 싶단 말이야!’

속으로는 화가 나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미 그를 용서할 구실-이번에는 어쩔 수 없고, 다음부터는 작품을 덥석 넘기지 않으리라는-을 찾고 있는 그녀에게 말했다. ‘쉽지 않겠는 걸? 용서를 남발하는 것도 버릇이 되면, 잘 고쳐지지 않는 거거든!’

여러분! 불평을 말할 때는 분명하고 단호하게 말해야 한 답니다. 특히 남자 상사나 부하에게 말을 할 때는 더욱 더!

이종훈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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