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추적] 한국서 쫓겨난 ‘반도체 스파이’ … 미 본사 부사장 승진 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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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반도체 기술 유출 사건의 핵심 인물인 미국 반도체 장비업체 AMAT의 부사장 곽모(47·구속기소)씨는 3년 전에도 기술을 빼돌린 의혹을 받았었다. 이에 삼성전자는 AMAT 미국 본사 측에 곽씨를 해고해 달라고 요구했었다. 하지만 그는 지난해 1월 미국 본사의 부사장으로 발령났다. 문책을 받아야 할 인물이 오히려 영전한 셈이다. 검찰은 그 배경을 주목하고 있다. 미국 본사가 곽씨가 주도한 기술 유출을 방조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검찰 조사 결과 곽씨는 2001년 1월 AMAT의 한국법인 AMK의 대표로 취임했다. 2004년 AMK 직원이 삼성전자의 기밀을 유출하려다 들킨 사건이 발생했다. 삼성은 당시 AMK에 경고하는 정도로 넘어갔지만 대표인 곽씨를 의심했다.

삼성전자는 2007년 ‘곽씨가 삼성전자 수석연구원(부장급) 나모(44·지명수배)씨와 어울린다’는 소문에 대해 조사를 벌였다. 내부 조사에서 나씨는 “곽 대표와 반도체 기술과 관련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고 진술했다. 삼성전자는 AMAT에 “곽 대표를 해고하고 재발 방지 약속을 해달라”고 공식 요구했다. 이에 AMAT 측은 “곽 대표에 대해 적절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답했다. 곽씨는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미국으로 떠났다. AMK 대표라는 직함은 여전히 달고 있었다. 하지만 지난해 1월 그는 미국 본사인 AMAT 부사장(등기이사)으로 다시 등장했다. 연매출 50억 달러(약 5조7500억원)에 이르는 세계 1위 반도체 장비업체의 등기 임원이 된 것이다. AMAT는 지난해 포춘지가 선정한 미국 500대 기업이다. 등기 임원이면 연봉도 수백만 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 관계자는 “곽씨가 그간 매출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곽씨는 미국에 체류하면서도 한 달에 한 번꼴로 귀국해 AMK를 방문했다. 지난해 12월 검찰이 AMK를 압수수색할 때에도 현장에서 붙잡혔다.

검찰은 AMAT 본사가 곽씨에게 보낸 의심스러운 e-메일을 입수했다. “하이닉스가 많이 힘들다고 하니 도와 줘라. 그러면 앞으로 굳건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또 곽씨는 AMK 직원들에게 e-메일을 보내 “하이닉스를 도와 주되 주의하라. 삼성이 알면 큰일난다”고 지시하기도 했다. 검찰 관계자는 “하이닉스 외에도 미국 등 해외 경쟁업체로 기술이 유출됐을 가능성이 충분하다”면서도 “미국 업체여서 추가 수사를 하지 못한 점은 아쉽다”고 말했다. 한편 이번 사건은 AMK가 “전직 직원들이 우리의 기술을 빼내 또 다른 회사를 세웠다”며 검찰에 고발하면서 불거진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이 직원들을 상대로 수사하는 과정에서 삼성전자의 기술이 AMK 측에 유출된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이정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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