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24시] 도로 집어넣은 '가토의 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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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20일 밤 도쿄(東京)의 한 호텔에서 열린 자민당 가토(加藤)파 의원 총회는 초상집 분위기였다. 모리 요시로(森喜朗)내각 타도에 나선 가토 고이치(加藤紘一)회장은 "여기서 명예롭게 물러나 힘을 쌓아나가자" 고 말했다.

자파 의원의 희생을 우려해 야당의 내각 불신임안에 찬성하겠다는 방침을 거둔 것이다. 패배 선언이었다. 불신임안 표결 국회가 열리기 직전이었다. 가토는 그러면서 "혼자라도 찬성표를 던지러 가겠다" 고 했다.

그 순간 여러 의원들이 뛰쳐나와 "안된다" 고 뜯어말렸다. 가토도, 다른 의원도 눈물을 글썽였다. '국민과 함께 하는 긴 드라마' 를 내건 가토의 반란은 1막까지도 가지 못한 채 막을 내렸다. 시나리오에 있던 모리 퇴진도, 정치개혁도 없는 '비극' 이자 찻잔 속의 태풍이었다.

가토의 갑작스런 백기에 대다수 일본 국민들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여론을 등에 업고 시작한 거사가 케케묵은 자민당의 파벌 논리로 끝났기 때문이다. 신문 지상에 소개된 반응은 차라리 분노에 가깝다.

"적 앞에서 도망친 꼴" "유권자에 대한 배신 행위" "국민을 바보로 만들었다" …. 가토파 사무실은 21일 하루종일 빗발치는 항의 전화에 시달려야 했다.

신문 논조도 준엄했다. 아사히(朝日)신문은 '가토씨여 한심스럽다' 는 제목의 사설에서 "가토의 행동에 깊은 실망을 금할 수 없다" 고 했다. 여론조사에서 국민의 4분의3이 모리 내각을 지지하지 않는 상황에서 가토에 건 기대를 엿보게 해준다.

저변의 정서를 감안하면 스스로 각본.주연.연출을 맡은 가토야말로 최대의 패자다. 파벌의 분열도 시작됐고, 회장직을 떠나라는 소리도 나오고 있다. 그렇다고 이번 싸움에서 자민당 주류가 이긴 것도 아니다.

한계상황에 달한 모리 내각을 수(數)의 논리로 다시 떠받친 자민당류 정치에 대한 불신은 오히려 부풀어났다.

작가 다카무라 가오루(高村薰)는 "유권자들은 현재의 자민당 체제로 정치가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역시 자민당이 깨지지 않으면 안된다. 내년의 참의원 선거를 두고보라" 고 말했다. 가토의 좌절은 자민당의 불행일지 모른다.

오영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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