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바이러스와 반세기 (30)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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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30. 스카웃 제의

오직 산꼭대기에 오른 사람만이 정상의 기쁨을 느낄 수 있다던가. 과학자에게 세계최초란 크나큰 영광이 아닐 수 없다.

돈을 벌어야하는 기업가에겐 최대가 중요하지만 진리를 탐구해야하는 과학자에겐 최초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76년의 나는 한창 물이 오른 과학자로서 전성기를 마음껏 구가했다. 지난 세월 겪어야했던 숱한 역경도 세계 각국에서 쏟아지는 찬사 앞에선 한낱 카타르시스를 위한 준비작업에 불과했다.

여기저기서 초청연설이 쇄도했다.

나는 77년 미국을 방문해 미국립보건원을 비롯한 유수한 연구기관에서 나의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중단을 통보했던 미육군의 연구비가 연장됐음은 물론이다. 유력한 곳에서 함께 일하자는 제의도 들어왔다.

미국립보건원에서 강의를 할 때 있었던 일이다. 강의를 마치자 당시 나를 초청한 미국립보건원 바이러스연구부장 깁스박사는 나를 자신의 방으로 불렀다. 그는 2백50달러란 당시로선 결코 적지 않은 강의료를 지급한 뒤 나에게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매년 4만달러의 연봉을 줄테니 유행성출혈열 바이러스연구팀을 만들어 팀장을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원하는 실험재료는 얼마든지 지원하겠다는 단서도 달았다.

미국립보건원(NIH)은 예나 지금이나 전세계 생의학연구의 총본산으로 의학자라면 누구나 이곳의 일원이 되길 꿈꾸는 곳이다.

그런 곳에서 평범한 연구원이 아닌 팀장자릴 제안했으니 귀가 솔깃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당시 내 수입이 월급과 연구비를 합쳐 1만달러에 불과했으니 무려 4배나 많은 연봉이 아닌가.

그날 저녁 나는 월터리드 미육군병원 바이러스부장이었던 에디대령의 집으로 초대됐다. 그는 대뜸 내게 "What was the big deal today□(오늘 거래가 어떠했느냐)" 고 물어보는 것이 아닌가. 에디대령도 NIH에서 나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을 것이라고 미리 짐작한 것이었다.

하긴 미육군으로서도 자신들이 공들여 키운 나를 NIH에 빼앗기기 싫을 것이다. 유능한 사람을 파격적인 대우로 스카웃하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미국에선 내가 NIH로 옮긴다해도 말릴 순 없는 일이었다.

나는 짧은 순간이었지만 많은 고민을 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한국식 의리를 지키자는 것이었다.

미육군이 무명의 학자였던 내게 그동안 지원한 은혜를 저버리기 어려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미육군의 지원은 절대적으로 도움이 됐다.

한국에 있었지만 필요한 실험기구나 시약은 세관을 거치지 않고 1주일 이내 한국에 도착했다.

여기저기 도장을 찍어야 겨우 실험기구나 시약을 얻을 수 있는 한국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이 때문에 오해도 있었다.

한번은 세관원들이 내 연구실로 들이닥쳐 밀반입 여부를 조사한 적도 있었다. 나에게 앙심을 품은 연구원 한 명이 세관에 밀고한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사용한 실험재료는 모두 미국정부의 재산일 뿐 내 개인 소유물이 아니었으므로 무사통과됐다.

내가 NIH로 가지 않은데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등줄쥐를 비롯한 유행성 출혈열의 연구재료는 한국에 있었다.

워싱턴 근교 베데스다에 있는 NIH로 옮길 경우 실험을 위해선 미국과 한국을 오가야하는 불편함이 불가피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결정적 이유는 한국에서 이룬 업적을 미국에 헌납하기 싫어서였다. 앞으로 내가 발표할 연구는 전부 한국의 고려대의대 이호왕이란 이름으로 학계에 발표되지만 NIH로 옮기게 되면 미국연구기관의 몫으로 돌아가게 된다.

새삼 '과학엔 국경이 없다.그러나 과학자에겐 국가가 있다' 란 파스퇴르의 명언이 떠올랐다.

이호왕 <학술원 회장>

정리=홍혜걸 의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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