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모리 페루대통령 조기사퇴 배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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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대통령을 세차례 하면서 정보부를 동원해 공작정치를 펼쳐온 알베르토 후지모리 페루 대통령이 결국 권좌에서 물러나게 됐다.

후지모리 대통령이 정치적 위기를 맞기 시작한 것은 지난 4월 대선 1차 투표에서 과반수 확보에 실패하면서부터다.

그는 자신이 1993년 개정한 삼선 금지 헌법규정을 어겨가며 대선에 출마했으나 원주민인 인디오 출신 알레한드로 톨레도 후보의 선전으로 결선투표까지 몰렸다.

톨레도 후보는 여당이 부정선거를 자행했다고 주장하며 결선투표에 불참했고, 후지모리는 지난 5월 삼선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후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벌어져 위기가 계속됐고 지난 9월 국가정보부가 야당의원을 매수하는 공작을 벌인 것이 드러나면서 거센 사임 압력에 부닥쳤다.

후지모리의 최측근인 블라디미로 몬테시노스 정보부장이 야당의원에게 돈을 건네며 여당 입당을 약속받은 이 사건은 한 케이블 TV가 매수 현장이 녹화된 테이프를 입수, 방영하면서 백일하에 드러났다.

후지모리는 사건이 터지자 즉각 조기 사임.대선을 약속했으나 이후 말을 바꿔 1년 가량 더 집권할 뜻을 내비쳐 야당의 반발을 샀다.

이후 군부의 쿠데타설이 돌고 시위가 거세어지자 후지모리는 정보부를 전면 수사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곧바로 몬테시노스 정보부장이 해외로 탈출, 후지모리는 배후조종했다는 의혹을 샀다.

그 뒤 페루 여야는 내년 4월 조기 대선을 실시하고 내년 7월까지만 후지모리의 집권을 연장하기로 합의, 잠시 정치적 안정을 되찾는 듯했다.

그러나 후지모리가 지난달 귀국한 몬테시노스 전 정보부장을 사면할 움직임을 보이면서 정국은 다시 악화됐다.

이 과정에서 후지모리는 군 수뇌부들을 측근으로 교체하는 바람에 군부의 반발을 사 한 장교가 부대원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특히 최근 야당의원이 국회의장에 당선되고 톨레도가 "연말까지 사임하라" 고 정치공세를 강화한 데다 정보부의 부정을 조사하는 특별검사가 마약밀매 단체로부터 돈을 받은 혐의로 후지모리를 조사할 방침임을 밝히면서 사태는 더욱 긴박하게 돌아갔다.

일본인 이민 2세인 후지모리 대통령은 90년 대통령에 당선, 집권 초기에는 경제 개혁 등으로 국민들로부터 높은 지지를 받았으나 금권선거를 자행하고 야당을 탄압하는 등 독재정치를 하면서 파멸의 길에 들어섰다. 후지모리는 현재 일본에 체류중이며 그가 망명을 요청했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

이상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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