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종신서원식 하던 날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7면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서울관구에 소속된 수녀들이 2일 오후 서울 명동성당에서 열린 종신서원 미사에 참석해 기도하고 있다. 종신서원은 수도자가 정결, 가난(청빈), 순명을 평생 지킬 것을 선서하는 예식이다. [오종택 기자]

2일 오후 2시 서울 명동성당에서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종신서원식이 열렸다. 1882년 국내에 들어온 샬트르 수녀회는 한국에서 역사가 가장 오랜 수녀원이다. 이날 122년 만에 처음으로 종신서원식을 공개했다.

성당 안은 1300여 명의 사람으로 빼곡했다. 가족과 친지와 친구들이었다. 수녀로서 평생 독신의 삶을 살겠다고 종신 서원하는 이들은 모두 12명. 성당의 사람들은 침묵으로 그들을 기다렸다.

이윽고 서원자들이 성당 문을 열고 들어섰다. 십자가를 든 이가 맨 앞에 섰다. 거기에는 그리스도가 못 박혀 있었다. 그 뒤를 12명의 서원자들이 따랐다. 손에는 큼직한 촛불이 하나씩 들려 있었다. 그랬다. 그들에게 그리스도는 빛이었다. 그리고 서원자들은 자신을 태우고 있었다. 나의 삶을 태우며 그 빛을 좇고 있었다.

성당에는 노래가 흘렀다. “행복하여라~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그들의 것이다.” 그 행복의 가사 속에서 서원자들이 제대 맨 앞자리에 앉았다. 얼굴은 앳돼 보였다. 눈은 무척 맑았다. 저토록 맑은 눈을 가꿨기에 저 길을 택하는 걸까. 서원자들은 두 손을 모았다.

주례를 맡은 황인국(서울대교구 수도회 담당 교구장 대리) 몬시뇰(고위 성직자)이 입을 뗐다. “2차 세계대전 때 미군이 어느 마을을 지나고 있었죠. 그런데 부서진 예수님 동상이 입구에 있었어요. 그 병사는 조각을 모두 모아서 붙였죠. 그런데 예수님의 손은 찾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동상 아래에 이렇게 썼죠. ‘나는 네 손이 필요하다’.” 이 말끝에 황 몬시뇰은 “주님은 당신 손을 필요로 하십니다”고 말했다.

잠시 후 제대 앞에 무릎을 꿇은 서원자들에게 물음이 날아갔다. “죄에 죽고 주님께 봉헌되었으니, 종신서원으로 하느님께 더욱 완전히 봉헌되기를 원하십니까?” 서원자들은 높은 목청으로 답했다. “예, 원합니다!” 그 외침이 맹렬하진 않았다. 부드러웠다. 그러나 어떠한 맹렬함보다 힘이 깃든 부드러움이었다. 그렇게 서원자들은 그리스도에게 독신의 길, 구도의 길을 청했다.

바로 뒷자리에 서원자의 부모들이 앉아 있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한 어머니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옆의 아버지는 천장을 보며 눈을 꼬옥 감았다. 쉽지 않은 길, 신랑 없는 딸의 혼례식. 건너편 부모는 아예 신자석에 엎드려 기도를 했다. 어깨만 살짝살짝 들썩였다.

수녀들은 서원문을 읽었다. 저마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정결과 가난과 순명의 삶을 서원하나이다”라고 맹세했다. 마지막 “아~멘!”의 울림이 컸다. 그 울림은 남달랐다. 자신의 온 생애를 걸고서 올리는 기도의 마침표였기 때문이다.

서원자들의 왼쪽 가슴에는 꽃이 꽂혀 있었다. 이날 서원자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스도는 이들에게 가서 꽃이 되었다. 그리스도 또한 이들의 이름을 불렀다. 이들도 그리스도의 꽃, 그리스도의 딸이 되었다. 그게 심플한 수녀복 위에 꽂힌 한 송이 꽃의 의미였다.

퇴장 직전이었다. 황 몬시뇰이 서원자의 가족들을 앞으로 불렀다. 식순에 없던 일이었다. 한 수녀는 뒤에서 아버지 어머니의 손을 꼬옥 잡았다. 입가에는 웃음이, 눈에는 물기가 비쳤다.

이날 종신서원한 김 라파엘라 수녀는 “드디어 삶의 의미를 찾았어요. 주님께 속한 그 하나의 이유로 제 삶의 이유를 찾았습니다”고 소감을 말했다. 라파엘라 수녀의 아버지는 수녀 수련기 때 세상을 떴다. 종신서원식에는 어머니만 참석했다. 홀로 된 어머니의 축하와 함께 이날 그는 독신의 길을 떠났다.

글=백성호 기자, 사진=오종택 기자, 그래픽=장주영·김영옥기자

◆서원(誓願·vow)=보다 선하고 훌륭하게 살겠다고 하느님에게 약속하는 행위다. 그 때문에 단순한 결심과 다르다. 결심을 어길 경우 양심상 가책을 느끼게 되지만 약속을 어길 경우 죄가 된다. 그 효력이 일생 동안 미치는 서원을 종신서원이라고 한다. 하느님의 뜻을 평생 따르고 실천하겠다는 의미다. 가톨릭 교회법상 만 21세가 넘어야 할 수 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