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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진의 시시각각

신의 저주와 인간의 보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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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아이티 지진은 새로운 종류의 지옥이다. 그동안 수만 또는 수십만이 죽은 자연재해는 많았다. 가까이만 보더라도 중국의 쓰촨 대지진, 미얀마의 사이클론, 동남아 쓰나미가 있었다. 그러나 아이티처럼 수도가 부서지고 정부가 무너진 적은 없었다. “땅이 두렵다”며 사람들이 바다로 뛰어든 적은 없었다. 인간의 생존 의지까지 위협한 적은 없었다. 아이티는 흑인노예들의 국가다. 비록 가난하지만 역사의 바닥에서 부활한 인간 승리다. 그런데 그런 역사의 처절한 피해자요 생존자를 신이 또 때렸다. 인간 문명에 대한 신의 저주는 왜 이토록 가혹한 것일까.

그런 신에게 인간은 그저 당하고만 있어야 하나. 아니다. 보란 듯 인류가 보복할 수 있는 길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아이티 재건을 또 하나의 위대한 문명의 진보로 만드는 것이다. 인류 역사에서 문명의 진보는 모든 형태의 압제로부터 인간을 구하는 것이었다. 1517년 독일의 신학자 루터는 종교개혁을 일으켰다. 면죄부라는 종교의 횡포로부터 인간을 구하고 근대(近代)를 열었다. 미국독립(1776년)과 프랑스혁명(1789년)은 왕이라는 봉건 압제로부터 인간을 구해냈다. 1863년 링컨은 노예 해방을 선언했다. 인종의 압제로부터 인간을 구해낸 것이다. 1893년 뉴질랜드는 세계 최초로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했다. 성(性)의 차별로부터 인간이 풀려나기 시작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공산주의로부터 인간의 자유정신이 해방됐다. 2009년 흑인 오바마가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 신이 만든 장벽을 인간이 무너뜨린 것이다.

그렇지만 아직도 진보가 이뤄지지 않은 그늘이 있다. 서구의 식민지배다. 가해자는 부국(富國)이 되었으나 피해자는 아직도 가난 속에서 신음한다. 아이티가 대표적이다. 이번 아이티 지진을 계기로 가해자가 피해자를 돕는 특별기금을 만들면 어떨까. ‘역사보상기금(Historical Compensation Fund)’ 같은 거 말이다. 식민지배 피해국이 재난을 당했을 때 이런 기금으로 재건을 도우면 인류 문명은 또 하나의 진보를 기록할 수 있다.

문명의 진보는 식민지배 가해자만의 몫이 아니다. 성장과정에서 세계의 도움을 받았다면 누구나 동참의 책임이 있다. 바로 한국 같은 나라다. 더군다나 한국은 G20 의장국이다. 그런데 한국이 제 몫을 못하고 있다. 아이티 지진에서 한국의 119구조대는 늦게 가서 일찍 나왔다. 프랑스 구조대는 15일이 지난 후에도 소녀를 구해냈다. 정부는 처음엔 강남 아파트 한 채 값도 안 되는 돈을 내겠다고 했다. 한국 대통령은 다보스 포럼에서 제일 먼저 연설한 국가원수였다. 그런데 G20 의장으로서 아이티 재건을 위해선 세계인에게 무슨 영감을 주었는가. 한국의 고위 관리들은 만세에는 빨라도 구호엔 느리다. G20 유치에 공을 내세우는 이는 많아도 아이티 지원을 주도하겠다는 이는 별로 없다.

한국은 세계인의 도움으로 문명의 진보를 이뤄냈다. 공산 침략을 물리치고 산업화·민주화 기적을 이뤄냈다. 이명박 대통령은 신년연설에서 “국제적 책임을 강화하기 위해 ODA(공적개발원조)와 PKO(유엔평화유지군) 참여를 늘리겠다”고 강조했다. 돈과 군대도 필요하지만 의식부터가 중요하다. 의식이 있다면 119가 그렇게 늦게 가고 대통령이 미흡하며 관리들이 무심하진 않을 것이다.

김진 논설위원·정치전문기자